[읽고 나니까 쓰고 싶어서]
호프 자런 / 김희정 옮김
알마 출판사
(1판 1쇄 2017.2.16/ 11쇄 2018.01.22)
* 표지의 3/4을 덮고 있던 날개는 잃어버렸고, 코팅되지 않은 종이로 된 표지가 찢어질까 걱정돼 그 옛날 아스테이지로 한 꺼풀 싸는 바람에 안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 책 제목이 희미하다.
남편이 사 온 책을 내가 먼저 읽으면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인생 3막의 시작쯤을 앞에 두고 있다고 본다면, 그 방향을 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남편과 그레타 툰베리 그리고 호프 자런을 꼽아야 할 거다. 두 번 읽었고, 좋았던 문장을 고르면서 또 한 번, 그리고 지금 타자로 옮겨 적으며 또 한 번, 읽을 때마다 초콜릿을 한 조각씩 먹고 있는 기분이다.
'랩걸'이라는 제목이 처음엔 맘에 들지 않았다. 흔히 소비되는 '소녀'들의 이야기일 것 같은 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걸'이라고 칭하는 일이 많아진다면 '소녀'의 이미지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게 정확히 뭐였을까. '호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그리고 '식물'에 대한 경이. 존경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존경심을 가져본 것이 꽤 오래였고, 그동안 그 마음을 가져보기를 열망했었는데, 드디어 조금 가지게 되었다는 해갈. 그런 감정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닮고 싶은 호프 자런은 이 책에 묘사된 만큼, 부주의하고 고집스러우며 충동적이면서도 솔직하고 유능하고 대체로 확신에 차 있는, 그런 일들을 적절한 문장들로 구사하는 사람으로서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나는 삶의 꽤 오랜 시간 예술을 쫓고 연구했다. 변칙과 가능성, 우연과 사건, 추함과 아름다움, 소용없음과 어리석음, 찰나와 역사에서 발생하는 진실 같은 것들에 매료되었고 그 중심에는 사람과 사랑이 있었다. 나는 예술을 선택했지만, 결코 믿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안전한 집이라기보다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벌판이었다. 나는 그게 쾌락이 주는 감각이라 생각하며 의심하지 않았는데, 호프에게는 쾌락도 있고 집도 있었다.
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내게 제공해주는 것. 나는 내가 해 온 일에서 거기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었다는 걸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추격자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게다가 그녀에게는 빌이 있다. 빌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집에 가면 가족이 있는 것처럼. 혼자 바보가 되지 않아도 됐고, 혼자 축배를 들지 않아도 됐다. 호프가 계속 연구하는 과학자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나 아들이 아닌 빌이! 그녀도 동의할 거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구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자꾸 아쉬움을 표하는 옛 동료가 있었다. 자신은 요즘 자기의 일이 너무 재밌다며,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급기야는 내가 곧 하게 될 새 일에 대해 재미없을 것 같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가 떠나온 곳에서 그와 같은 일을 했었고, 그곳은 나에게 사막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막을 벗어날 기회가 모두에게 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는 결코 순수한 쾌락주의자는 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재미'가 날 숨 쉬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지금 정말로 사막에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녀의 문장으로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가 없다. 책을 덮고 나면 식물 이름이 뭐였는지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 같은 디테일은 금방 까먹어버리지만, 내가 지구의 아주 신비로운 비밀들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 그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는 친구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은 만족스런 여운이 남는다. 무엇보다 식물에 대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흥분된다. 실제로 나는 내 삶의 한 가지 주제로 진지하게 식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문장들을 다시 타이핑하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내가 이 부분들을 다 외워버리고 싶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스포라고 해야 하나 걱정도 되지만, 책 전체는 이보다 더 많은 세계를 담고 있기에 안도한다.)
p9
바다의 평균적인 식물은 약 20일 정도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육지의 평균적인 식물은 100년 넘게 사는 2톤짜리 나무다. 바다에 사는 식물과 동물의 질량비는 4에 가깝지만 육지에서는 그 비가 1,000에 달한다. 식물의 개체 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미국 서부의 보호림 안에만도 800억 그루의 나무가 산다. 미국 내 나무와 사람의 비는 200을 훨씬 넘는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이 숫자를 알고 난 후 내 눈에는 식물 말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p27
우리 정원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곳에서 맡은 향기나 본모습이 아니라 거기서 들은 소리였다. 환청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는 정말로 식물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절정기에는 옥수수가 날마다 하루에 1인치씩 자라고, 그 빠른 성장에 맞추기 위해 여러 겹의 껍질이 조금씩 움직인다. 바람이 불지 않는 조용한 8월에 옥수수밭 한가운데 서 있으면 그렇게 움직이는 껍질들이 계속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엄마와 정원 흙을 파면서 나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비틀거리며 뭔가를 찾아다니는 게으른 벌들의 웅웅거리는 소리, 우리 집 새모이함을 흉보느라 짹짹거리는 홍관조들 소리, 흙을 파는 우리가 내는 모종삽 소리, 그리고 매일 정오에 권위 있게 울리는 공장의 호각 소리 등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p33
과학 강의들은 아직은 해결이 가능한 사회 문제를 다뤘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도 않는 정치 체제, 그것을 제안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다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그런 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는 강의들이 아니었다. 과학에서는 애초에 고대 서적에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쓴 책들을 분석하기 위해 쓰여진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p47
십 대의 관점에서 볼 때 어른 나무들은 바보 같으면서도 무한한 미래를 의미했다. 50년, 80년, 어쩌면 100년을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존재, 날마다 아침이 되면 전날 떨어진 바늘 잎을 대신할 새잎을 만들고, 밤에는 효소 분비를 중지하는 것으로 일과를 끝내는 존재, 땅 밑 새로운 영역을 정복한 후 갑작스레 영양소가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고, 지난겨울에 새로 난 틈으로 믿음직하고 오래된 굳은 뿌리가 살짝 세력을 늘리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 나무는 매년 허리가 조금 더 두꺼워지는 것 말고는 수십 년이 흐르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다. 가지에는 어렵사리 얻은 영양소가 늘 배고픈 젊은 세대의 코앞에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걸려 있다.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깊고 풍요로운 곳,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햇빛 가득한 좋은 동네에 사는 나무들은 타고난 잠재력을 백분 발휘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조건이 나쁜 동네에 사는 나무들은 좋은 동네 나무들보다 키는 반도 못 크고, 쑥쑥 크는 십 대 시절도 없이 생명을 부지하는 데 집중하면서 운이 좋은 나무들이 자라는 속도의 절반도 안 되는 속도로 자란다.
p51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껍질을 깬 씨앗만 수천 개가 넘지만 그다음 날 거기서 나온 초록을 보면 언제나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토록 어려운 일이 약간의 도움으로 그토록 쉬워진 것이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몸을 펼치고 원래 되려고 의도했던 그 존재가 마침내 될 수 있는 것이다. 연꽃(Nelumbo nucifera) 씨앗의 껍질을 열고 배아를 성장시킨 과학자들은 그 껍질을 보존했다. 그 껍질을 방사성 탄소연대법으로 측정한 과학자들은 그 연밥이 중국의 토탄 늪에서 2,000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이 작은 씨앗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틴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작은 식물의 열망이 어느 실험실 안에서 활짝 피었다. 그 연꽃은 지금 어디 있을까.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p82
주근은 곁뿌리를 내보내 옆에 서 있는 다른 식물들의 뿌리와 얽혀서 위험 신호를 주고받는다. 시냅스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뉴런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뿌리 시스템 즉 근계의 표면적을 모두 합하면 이파리 면적을 모두 합한 것의 100배가 넘는 경우가 많다. 땅 위의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제어해도 멀쩡한 뿌리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비웃듯 다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희생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장 깊이 뿌리는 내리는 것들은 대담한 아카시아나무(아카시아속)들이다. 수에즈 운하를 위해 처음 땅을 파기 시작했을 때 보잘것없는 작은 아카시아나무의 가시 많은 뿌리가 땅 밑 12미터, 40피트, 30미터까지 뻗은 것이 발견되었다고 토머스(2000), 스킨(2006), 레이븐(2005)은 각각 보고한다. [...] 내가 상상하는 1860년 그 땅 밑에서는 사람들이 이 놀라운 발견에 서로 축하하고, 뿌리 주변에 모여들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 뿌리를 반으로 동강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p135
식물들에게 빛은 곧 생명이다. 나무가 자라면 아래쪽 가지는 새로 난 위쪽 가지들의 그늘에 가려 아무 소용이 없어져서 한물간 퇴물이 된다. 버드나무는 이렇게 못 쓰게 된 가지에 예비 식량을 저장해서 그 가지들을 살찌우고 튼튼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밑동 부분의 수분을 마르게 하면 가지가 깨끗하게 떨어져 강물에 떠내려간다. 물에 실려 흘러가던 가지들 100만 개 중 하나는 강둑에 쓸려 올라가 뿌리를 내린다. 얼마 가지 않아 원래 나무와 같은 나무가 다른 장소에서 자라는 것이다. [...] 지구 상에 살아있는 식물 중 가장 오래된 식물류는 쇠뜨기라고 부르는 속새류(Equisetum)의 식물이다. 현재까지 번창하고 있는 속새류 중 열다섯 가지 정도 되는 종은 3억 9500만 년의 지구 역사를 목격해왔다. 그들은 최초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나무들을 목격했고, 공룡이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것도 지켜봤다. [...] 페리시(Ferrissii)라는 이름의 잡종 쇠뜨기는 번식을 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일부가 떨어져 나가 다른 곳에 정착하는 방법만으로 종족 유지를 한다. 오래된 식물이고 번식 능력도 없지만 페리시는 캘리포니아에서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그들도 새로 학위를 받은 박사처럼 나라 반대편에 있는 새로운 기술 대학에 이사해서 목련과 달콤한 차를 발견하고, 깜깜하고 습한 밤에 반딧불을 보며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했을까? 아니다. 페리시 쇠뜨기들은 살아 숨 쉬는 생물답게 땅을 건너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린 다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p152
나무와 곰팡이는 왜 공생할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곰팡이는 어디에서나 혼자서 잘 살 수 있지만, 더 쉽고 독립적인 삶을 포기하고 나무뿌리를 둘러싸고 도와주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식물의 뿌리에서 직접 나오는 순수한 당분을 찾도록 적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당분은 숲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이고 농축된 화합물이다. 어쩌면 곰팡이도 공생관계를 이루어 살면 혼자서 외롭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p173
가로등 정도 키의 관상용 단풍나무를 생각해보자. 숲 속 단풍나무의 4분의 1 크기 정도 되는 이웃 정원의 아담한 나무 말이다. [...] 우리의 작은 단풍나무에 달린 이파리는 모두 합치면 약 15킬로그램 정도 된다. 나무는 그 15킬로그램을 만드는 1그램, 1그램을 모두 공기 중에서 뽑거나 땅에서 캐내야 한다. 그것도 몇 달 안에 재빨리. [...] 식물 색소인 엽록소는 크기가 큰 분자로, 숟가락 모양의 엽록소의 가운데 파인 부분에는 소중한 마그네슘 원자 하나가 앉아있다. 15킬로그램의 이파리에 연료 공급을 하는 엽록소에 필요한 마그네슘의 양은 하루에 하나씩 복용하는 비타민제 열네 개에 든 양과 같다. 마그네슘은 암반에서 녹아 나오는 물질로, 그것을 얻는 것은 지질학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우리 나무가 필요로 하는 마그네슘, 인, 철분, 그리고 수많은 미량 영양소는 흙 안에 있는 작은 무기질 덩어리 사이를 흐르는 극도로 희석된 용액에서 얻어진다. 15킬로그램의 이파리가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들을 흙에서 모으려면 나무는 적어도 3만여 리터의 물을 흙에서 빨아들여 증발시켜야 한다. 그 정도면 유조차를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고, 스물다섯 명의 사람이 1년 동안 마실 수 있는 물이며, 다음에 언제 비가 올지 걱정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양의 물이다.
p185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나는 앞서 나갈 수가 없었다. 샤워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의식이 됐다. 아침식사와 점심은 책상 밑에 쌓아둔 영양 음료 한두 캔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심지어 한 번은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레바의 간식용 뼈다귀를 가방에 던져 넣은 적도 있다. 세미나에 가서 씹으면 꼬르륵거리는 내 배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십 대 때도 나지 않던 여드름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로 폭발했고, 나는 손톱을 공격적으로 물어뜯으며 매일 시간을 보냈다. 잠깐씩 연애에 발을 담가본 결과 나는 사랑의 영역에서는 할인 대방출 코너에 방치될 종류의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내가 만난 독신남들은 왜 내가 계속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차피 몇 시간에 걸쳐 식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이 되면 이럴 것이라고 내가 접해온 이미지들과 비교해서 내 삶은 모든 면에서 엉망진창이었다.
p203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물은 너무 적고, 빛은 너무 많고, 온도는 너무 높은 상태. 사막은 이 모든 불편한 조건을 극대화해서 가지고 있는 곳이다. [...] 날씨가 매우 건조해지면 선인장은 뿌리를 절단해서 타들어가는 흙이 뿌리에서 물을 빨아내는 것을 방지한다. 선인장은 뿌리가 없이도 4일 정도 살아남을 수 있고, 그동안에도 계속 자랄 수 있다. 4일 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선인장은 수축을 시작하는데 어떨 때는 이 수축을 몇 달간, 혹은 주름이 모두 접혀서 닫힐 때까지 계속한다. 선인장의 가시는 이제 딱딱하고 공처럼 된, 뿌리도 없는 식물을 보호하는 촘촘하고 위험한 보호층 역할을 한다. [...] 부활초의 이파리들은 바삭바삭한 갈색으로 말라붙은 채 버티고, 몇 년 동안 죽은 척하다가 수분을 다시 받으면 정상 기능을 되찾는다. [...] 죽음에서 다시 깨어난 직후 그 묘한 기간 동안 식물은 순수하게 농축된 당을 먹으며 살아남는다. 1년 내내 먹고살 수 있는 수크로오스가 단 하루 만에 관을 통해 온몸에 퍼지면서 짙은 달콤함이 지속된다. 이 작은 식물이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죽음의 시든 갈색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난 위업을 이루었지 않은가. 물론 이 기적은 오래가지 않는다. [...] 그러나 잠시 스쳐 지나가듯 누리는 영광스러운 그 순간 부활초는 다른 식물은 전혀 모르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누린다. 비로 초록이 아니면서도 성장을 하는 비밀 말이다.
p214
여름이 깊어지면서 남쪽 지방은 점점 더 더워졌지만 나무들은 이미 겨울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성장 속도는 느려지고, 따라서 땀도 덜 흘리기 시작했다. 이 나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온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도는 그들 세상의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의 세상은 이파리를 만드는 목적에 집중하고 있었다.
p238-241
유칼립투스들 사이를 지나갈 때면 톡 쏘고 매콤하면서도 약간 비누향 비슷한 냄새에 휩싸인다. 유칼립투스들이 만들어 분출해서 공기 중에 퍼져 있는 화학물질, 즉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감지한 결과다. [...] 휘발성 유기 화합물은 잎이나 나무껍질에 상처가 났을 때 감염을 방지해서 건강하게 유지하는 소독약 기능을 한다. [...] 숲 안에서 생산되는 휘발성 유기 화합물의 양은 늘었다 줄었다 한다. 모종의 신호에 따라서 개별적인 화합물의 제조를 껐다 켰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4억 년에 걸친 식물과 곤충 사이의 전쟁에서 양쪽은 모두 얼마간 피해를 입었다. 1977년, 워싱턴 주 킹 카운티에 있는 주립대학 연구용 숲은 곤충의 습격을 받아 완전히 폐허가 됐다. 공격에 앞장선 것은 텐트나방 애벌레들이었다. [...] 1979년, 워싱턴 주립대학의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은 공격에서 살아남은 나무들에서 딴 이파리들을 텐트나방 애벌레들에게 주고 그들이 잎을 먹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이 애벌레들이 보통 애벌레들보다 훨씬 천천히 자라고 병색이 완연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2년 전 같은 나무의 이파리를 먹고 자란 애벌레들과 비교해도 자라는 속도가 훨씬 느렸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파리에 들어있는 어떤 화학 물질이 그들을 병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흥분되는 일은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라는 건강한 시트카 버드나무들, 즉 한 번도 공격을 당하지 않은 버드나무들도 텐트나방 애벌레들 입맛에 맞지 않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자라는 건강한 나무들에서 딴 이파리들을 먹은 애벌레들도 시들시들하고 병이 들어 2년 전처럼 순식간에 숲을 파괴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과학자들도 뿌리에서 뿌리로 전달되는 신호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땅속에서 화학물을 분비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위 연구에서 관찰된 시트카 버드나무 두 집단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흙을 통해 의사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명 땅 위에서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분명했다. 과학자들은 이파리들이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 나무가 잎에 애벌레 독을 가득 채웠고, 그로 인해 휘발성 유기 화합물의 생성도 촉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휘발성 유기 화합물들이 적어도 1~2킬로미터는 퍼져나갔고, 다른 나무들은 이를 조난 신호로 받아들여서 이파리에 미리 애벌레 독을 주입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 1980년대 내내 애벌레들은 대대로 이 독 때문에 비참하게 굶어 죽었다. [...] 어쩌면 위기가 닥치면 나무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카 버드나무 실험은 모든 것을 바꾼 아름답고도 훌륭한 연구의 예다.
p255
첫 식물이 어찌어찌 육지로 진출한 후, 처음에는 습지로 시작해 숲으로 변화하면서 모든 대륙이 초록으로 뒤덮이는 데는 몇 백만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30억 년 동안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 중 단 한종의 생물만이 이 모든 과정을 뒤집어 지구를 훨씬 덜 푸른 곳으로 만들 능력을 지녔다. 도시화는 식물들이 4억 년 전에 고생 끝에 푸르게 만들었던 곳에서 식물의 흔적을 없애고 땅을 다시 딱딱하고 황폐한 곳으로 되돌리고 있다. 미국 내 도시 지역 면적은 향후 40년 사이에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어서 펜실베이니아 주 크기만큼의 보호 수림 지역이 없어질 전망이다. 심지어 개발도상국들에서는 도시화 현상이 이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훨씬 더 큰 지역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5년마다 펜실베이니아 주 크기의 삼림이 도시로 변하고 있다.
p289-290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꽃가루의 99.9%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수정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가야 할 곳에 진짜 도착한 극소수의 꽃가루들에게는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바람, 곤충, 새, 설치류 혹은 택배상자... 식물의 대부분은 꽃가루가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씨방 하나를 수정시켜 씨로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꽃가루 단 한 톨이다. 씨 하나가 나무 한 그루로 자랄 수 있다. 나무 하나는 매년 수십만 송이의 꽃을 피운다. 꽃 한 송이는 수십만 개의 꽃가루를 만들어낸다. 성공적인 식물의 생식은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한번 일어나면 초신성에 버금가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p293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너무도 쉬웠고, 내게 과분했기에 더 달콤했다.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돈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나와 나눌 것이고, 나는 내 상상력을 그와 나눌 것이다. [...] 우리는 코펜하겐으로 날아가서 주말을 지내고 매년 여름을 남프랑스에서 보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진행되는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 실제는 영화보다 더 낫다. 끝나지 않고, 우리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며, 나는 화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396
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잘한다. 나는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해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일찍 죽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너무 여성적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는가 하면 너무 만성적이어서 못 믿겠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고, 비정하고 무감각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나만큼이나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내가 여성 과학자이기 때문에 누구도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내가 무엇인지를 만들어나가면 되는 값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동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충고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음 두 문장을 되뇐다: 이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할 때를 빼고.
[...]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에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너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석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