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도저히는 참을 수 없어서,
“시끄럿-!”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철벽방음이라도 되어 있는 줄 아는지 아침에 기상하면서 길게 한 번, 오후에는 짧게 여러 번 이유를 알 수 없는 간헐적 괴성을 상습적으로 질러대는 이웃집 한 남성 때문에 불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짜증 내는 것도 아깝다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데, 오늘은 이미 겹겹이 기분이 별로인 터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목이 칼칼했다. 요 며칠 미세먼지가 나쁨이더니 그래서 그런가. 냉장고에 반에 반쯤 남아있던 소주를 꺼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같이 저녁 먹으면서 한 잔 하면 좋을 텐데 그의 귀가 시간은 한 시간도 더 남았고,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역시나 먹다 남은 오뎅볶음을 안주삼아 빠르게 한 잔 들이켠다. 라면이라도 끓일까 하다가 관둔다. 내가 지금 저녁을 먹어버리면 이따가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남편을 상상하니 좀 불쌍하기도 해서 이쯤 하기로 한다.
점심때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그냥 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또 감사한 친구들이다. 나의 10대 후반을 기억해 주는 몇 안 되는 귀한 존재들. 각자의 시댁이 얼마나 이상한지, 남편은 또 얼마나 못마땅한지에 관한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넷 중에 한 명만 애기가 있는 터라 애들 교육 문제는 낄 자리가 없다. 그중 이직에 이직을 거듭하며 연봉을 올리고 있는 친구가 다음 주에 또 이직한다며 일주일간 휴가란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로 그런 결정을 하게 됐는지, 이번 회사는 어떤 점이 괜찮은지 조리 있게 조잘대는 친구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만족감이 충만했다. 욕심도 많고, 자존심도 세서 어딜 가나 똑 부러지게 일을 처리하고, 주변사람들을 적절히 챙기며 또 이용할 줄도 아는 나무랄 데 없는 커리어우먼이라고나 할까. 가치관에 있어서는 나와 분명 다른 점들이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은 역시나 보기 좋았다.
근데 나는 왜 언제부터 기분이 안 좋아졌을까?
사실 요즘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이 나라의 말단 ‘공무원’으로 내 삶의 후반기를 거의 다 소진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거다. 일찍이 하고 싶은 일이 분명했던 나는 내 꿈에 열정적이었고, 내 일의 의미와 재미가 무엇으로 불리는 지나, 얼마를 받는 지보다 더 중요했다. 그러다 맞이한 새로운 도전은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경유해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데 대부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다는 ‘공무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정년까지 있을 생각, 칼퇴할 생각도 없는 나의 직업은 정년 보장되고 칼퇴한다는 ‘공무원’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하는 것도 지치고, 반복되는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일에 대한 흥미도 예전 같지 않아 졌다. 너는 ‘공무원’이니까 이제 걱정 없지 뭐- 라는 말을 듣거나, 내가 정말 이 분야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새롭게 다시 열심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 스멀스멀 화가 났다. 솟아난 화는 나아갈 방향을 모른 채 가슴속에서 맴돌고 맴돌다 후회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고, 절망이 되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나는 패배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 아마도 오늘 낮 아름다운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에게 또 한 번 물어봐야 했을 거다. 너는 왜 여기에 있냐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그렇게 스스로 다그치고, 그러다 화가 나고, 그러다 소주 생각이 났던 거다. 세 잔을 연거푸 들이켜도 정신이 또렷하기만 하다.
불안한 거다. 나는. 내가 이 길을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처음의 마음들을 다 잊게 될까 봐. 그래서 내 색깔과 취향과 성격을 잃어버리고, 지난 20대의 찬란한 시절을 그리워만 하는 그냥 회색빛의 ‘공무원’이 되고 말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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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친구가 직접 만들어 선물한 아몬드 초콜릿을 씹으며 생각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망한 것처럼 그러지 말자고. 아몬드 한 알, 한 알을 볶고, 그 위에 초콜릿을 입혀 깜찍한 유리병에 담아 넣었을 그 정성에 감사하고, 또 오늘에 감사하자고. 이 시간을 잘 받아들여 보자고.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