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서랍에 있던 일기

by 영랑

(2020.9.27.)


지난번 부모님 댁에 내려가는 길 차 안에서 우리는 꽤 긴 토론 끝에 나의 정체성을 매듭지었다.

나는 엘리트 노예라고.


배운 건 있어서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도 잘 하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누군가 나에게 일정한 일을 맡기고 그 결과를 검토하여 평가하고 판단해 주는 생활에 익숙하며, 일 없이 쉬는 날이 상당기간 지속되면 제발, 제발 누구라도 나에게 뭔가를 시키기를 바라는 상태가 된다고. 아름답게 말하자면, 주어진 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타입. 적나라하게 보자면 스스로 새로운 판을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무리인 현대판 노예.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자격증을 알아보고,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풀석거리다가도, 갑자기 자기소개서에 어떻게 써야 내 경력을 딱 알맞게 끼워 맞출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지난번과 유사하지만 겉으로는 적당해 보이는 일자리에 지원하게 된다.


오늘 너는 그런 말을 했지. 누구나 그런다고.

A 하겠다고 주야장천 달리다가도 갑자기 나타난 B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잘되기도 하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게 어디로 가는 길인지 다들 잘 모른다고. 그치만, 분명한 건 나는 어딘가 매이는 게 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응, 내가 노예라는 거지?)


지난주에 면접을 보고,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합격했다 하더라도 정말 갈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을 거였는데, 마음이 왤케 서운하고 찝찝하던지. 사실 면접장 가보니 알겠더라. 엄청 진지한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내가 얼마나 가볍게 이곳에 왔는지를. 다들 열심히 원하는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또 지원서를 쓰게 될 거라면, 정말 열심히 원하는 곳에 쓰자고. 그럴 수 있을 때, 그럴 수 있을 곳에만 그러자고. 그래서 혹시 불합격하게 된다면 서운함쯤이 아니라 큰 슬픔을 겪게 될 어딘가를 원하자고.


주어진 환경, 정해진 규칙을 자꾸 원하는 흡사 노예 같은 네 모습 괜찮아. 괜찮아.

꼬박꼬박 직장 생활하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이해해. 추억은 원래 아름답게 변하잖아.

그치만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못 살겠다면서도, 정작 무언가를 또 시작하려고 할 때 망설이는 건 아직 시작하지 못한 다른 많은 것들이 맘에 걸리기 때문이지. 욕심만 많아가지고.


뭘 원하는지 스스로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다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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