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무게

1년 차

by 영랑

팀장님이랑 출장을 나가면 식물이름 익히고 구분하는 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쏙 빠진다. 아직 새 잎이 나오기 전이었던 요 몇 주간은 아무리 깜깜이어도 수피만으로는 원래 헷갈린다는 말에 나름 위로를 받았는데, 이제는 하나 둘 새 잎이 나오는데도 도저히 이 나무와 저 나무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어, 또는 아예 어떤 나무인지 감도 잡을 수 없어 절망하다 못해 허탈한 웃음이 난다.


신나무부터 시작해서 복자기, 고로쇠, 단풍, 당단풍, 중국단풍까지 같은 집안 식구들 얘기를 쭉 하시다가, 산수유, 물푸레, 들메, 물박달 등등 눈에 보이는 대로 특징들을 열거하고 연결하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듣고 또 하고 있는 건지 몽롱해진다. 이제 그만하자고 돌아서는 찰나,


사람들은 산수유 꽃만 먼저 피는 줄 알지?
여기 회양목, 주목, 버드나무도 꽃이 다 피었는데-


하시는데 그 말이 어찌나 또렷하던지.

솔직히 말해서, 산수유가 먼저 피는지- 잎이 나오고 나서 피는지- 그전에 피는지- 등등 꽃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이제 고작 1년 정도 된 나로서는 모든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웬만한 아파트 길목마다 상자모양으로 정갈하게 깎여있는 회양목에서도 꽃이 핀다고 하니 다 지쳤던 호기심이 다시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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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꽃(20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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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수꽃(20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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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수꽃(2023.3.24.)


한참 사진을 찍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문득 계절의 무게가 느껴졌다.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에서 느껴왔던 산뜻함이 전혀 아니었다. 지구상의 모든 식물들, 길에 밟히는 풀 한 포기도 이 계절의 변화를 감각하여 아주 정교하고 질서 있게 그리고 힘차게 생명 활동을 하고 있다는, 엄청나게 거대한 생명체의 원리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요즘은 이런 압도적인 순간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의 눈코입귀손 말고 또 다른 눈코입귀손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하던 일을 떠나오면서,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서 좁게만 보고 살아왔다고 자평했었는데 틀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 말고, 내 옆의 생명체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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