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한 관계 예찬
사람을 처음 만나고 정제된 언어를 주고받던 초기가 지나면, 무르익기 직전의 단계가 꼭 찾아온다. 귤로 비유하자면 땡땡한 청귤이 제법 말랑해지는 그쯤인데, 그때는 꽁꽁 숨겨놓고 나 혼자만이 꺼내보았던 무질서하고 부도덕한 언행이 튀어나오기 쉽다. 바닥이 잘 드러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단계는 풋풋하고 조금 설렜던 첫 만남까지 퇴색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다. 멀끔한 옷을 입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구멍 뚫리고 해지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온라인에 오래 머물수록 오프라인으로 옮겨오는 만남들이 두렵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의 바닥이 보일까 봐 조급증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르익기 직전에 주고받는 감정들이 싫은 이유에서다. 편함을 가장한 무심함이라든지, 친근함을 가장한 언어폭력과 같은 것들이 상대를 낯설게 하고, 종내에는 경원하게 한다. 그래서 땡땡하게 껍질을 입은 관계를 추구하는 요즘이다.
무르익은 관계는 아늑한 당연함이 수반된다. 상대가 늘 내 곁에 존재할 것이라는 당위,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하면서도 상대에겐 따끔한 말을 할 수도 있다는 부조리와 같은 종류의 당연함 말이다. 나를 세심하게 관찰했던 상대가 이제는 나를 다 알아버려서 싫증이 났다는 걸 알고 나면 한없이 고독해진다. 나도 상대방을 모르고 상대방도 나를 모르기에 우리의 관계는 이토록 애틋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격을 갖추고 서로를 마주할 때 무궁한 인간애가 솟구친다. 안일한 마음과 안주하는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더 이상 처음의 우리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각자이면서도 우리일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으로 쌓아 올린 성과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당장 푸릇푸릇 돋아난 새싹에게 잘 익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기에 꽃봉오리의 오랜 과정이 두렵다. 꽃일 때 풍기는 깊은 향기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니 열매로 곧장 내달리지 않을 거라면 은근한 새싹이 되고 싶다. 편하지만 매일 낯설고 궁금한 상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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