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내 여자의 열매>
한강 작가의 단편집 <여수의 사랑>이 이삼십 대 주인공들의 삶을 곡진하게 들여다보고 방황의 밑바닥에 깔린 어둠의 내막을 파헤친 글이라면 <내 여자의 열매>는 주인공들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 어머니의 존재가 저무는 해 뒤로 붉게 물드는 하늘처럼 자리한다.
<여수의 사랑>이 매운맛이었다면 <내 여자의 열매>는 그에 비해 보통맛 정도로 느껴졌다. 어쩌면 <여수의 사랑>을 먼저 읽고 진한 어둠에 단련되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 여자의 열매>에는 총 여덟 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채식주의자>의 모태가 된 <내 여자의 열매>가 첫 소설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실제로 식물이 된다는 것이 <채식주의자>와는 다른 부분이다. 여덟 편의 이야기 중에 나는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강 작가의 글 중에서 아이의 시점에서 쓰인 글을 처음 접했다. 초등학교 삼학년 여자아이는 아빠와 함께 어느 날 엄마에게 버림을 받는다. 모텔 방에서 술에 취해 잠든 아빠를 보며 집 나가기 전 엄마가 내뱉던 “지겨워, 진저리가 나.”를 나지막이 되풀이하는 아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아빠라도 곁에 있으면 안심하는 아이. 어린 나이에 체념을 일찌감치 배워버린 아이. 아빠가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는 아이.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가 떠났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고, 그렇다고 아주 떠난 게 아니라 곧 돌아올 것이라고도 희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생겨난 일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91쪽)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것이 괴로와서 엄마는 이 마음을 버렸을까, 그래서 우리 둘을 떠나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98~99쪽)
“해질녁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99쪽)
너무 어린 나이에 인생의 아픔을 알아버린 아이는 자라면 어떤 성인이 될까? <내 여자의 열매>에 나오는 ‘아내’ 같은 사람이 될까. <여수의 사랑>에 나오는 자흔이나 정선 또는 <붉은 닻>에 나오는 동식이나 동영 같은 사람이 될까. 인간의 삶이라는 건 저마다 고통을 안고 있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 아이도 아빠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한강 작가가 즐겨 쓰는 희망의 암시로 ‘박명’처럼 돋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를 관통하는 단어로 나는 ‘빛’을 꼽고 싶다. 소설 속에서 어둠이 상처, 고통, 아픔 등을 상징한다면 그에 반대되는 지향점이 빛일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끌어안고 미약하나마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위안을 받으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에서 나를 희망의 빛으로 끌어준 인상 깊은 문장을 되뇌어 본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174쪽 <아기 부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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