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런 거지” 라는 표현이 106번이나 나오는 책이 있다. 바로 커트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 <제5도살장>이다. 영어로 하면 So it goes.
소설인가, 자서전인가? 초반에는 살짝 헷갈렸다. 하지만 소설이 맞다. 작가 본인이 겪은 독일 드레스덴 폭격을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다. 1장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 드레스덴에서 겪은 일을 쓰겠다고 장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함께 그곳에서 같은 경험을 나눈 친구를 만나 기억을 더듬고 악의를 보이는 친구의 부인을 이해시키고… 그렇게 1장은 흘러간다. 이 부분 때문에 소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2장부터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미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빌리는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으로 간다. 그곳에서 폭격을 당하고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이 경험은 그의 삶에 깊게 침투해 여러 형태로 돌출된다.
문체가 독특하다. 감정을 덜어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빌리의 관점이면서 어느 순간 '나'라는 작가가 2~3번 튀어나온다. 현실을 뛰어넘어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 이야기가 등장하고 빌리는 시간을 수시로 넘나드는 시간 여행자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레스덴을 경험하고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완성한 이야기. 어쩌면 작가의 혼란스러운 경험과 고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런 독특한 구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책이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네요, 샘.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늘 그렇습니다.” (33쪽)
책에 106번이나 등장하는 “뭐 그런 거지.”라는 표현은 죽음이나 그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 나온다. 내가 느낀 “뭐 그런 거지”에 담긴 의미를 책에 나온 말로 정의해본다면 이렇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35쪽)
“자려고 깨어나, 나의 깨어남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 두려워할 수 없는 것에서 내 운명을 느낀다. / 가야만 하는 곳에 감으로써 배운다.” (36쪽) (미국 시인 시어도어 레트키, 『바람에 실려온 말』)
“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나는 그걸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246쪽)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82쪽
책에서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었다”라는 문장이 몇 번 나오는데 “뭐 그런 거지”는 필연,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 냉소, 체념, 무상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드레스덴 폭격의 중심에서 겪었고 그 이후에도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자신을 다독이는 말. 결국 인생에서 겪는 죽음이란 더구나 전쟁이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일이므로 '뭐 그런 거지'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게 흘려보내야 하는 상처가 아닐는지.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43쪽)
“- 왜 나죠?
- 왜 우리여야 할까요? 왜 뭐여야 할까요? 그냥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 있는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왜도 없습니다.” (101~102쪽)
“모든 시간은 모든 시간이죠.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리 알려줄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있는 거죠.” (112쪽)
“모두 한꺼번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삶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펜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에서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바다입니다.” (116쪽)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242쪽)
트랄파마도어인의 등장은 그들의 입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필수 불가결 요소로 보인다. 후반에 같은 병실에 입원한 럼포드 교수의 등장도 드레스덴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장치 같다. 그의 소설은 구성이 독특하면서도 치밀한 필요에 의해 짜여진 고도의 전략품이다. 간혹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책 제목인 <제5도살장>은 돼지 도살장이었던 곳이다. 드레스덴 폭격 당시 빌리를 포함한 포로들은 이곳 제5도살장에 피신했다가 살아남는다. 돼지를 도살하는 곳에서 목숨을 구했다는 아이러니. 이처럼 작가 특유의 아이러니한 태도와 냉소적 유머가 곳곳에 스며 있다. 무엇보다 전쟁과 포로로 잡힌 경험의 트라우마가 삶에 얼마나 깊숙이 관계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So it goes.”라는 문장이 한동안 입안에 맴돌았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모든 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두려워할 수 없는 것에서 운명을 느끼며 가야만 하는 곳에 감으로써 배운다.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분별하려 애쓰며 그렇게 살아간다. So it g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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