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Nov 24. 2023

어웨이 프롬 미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책과 카드를 선물받았다. 카드에는 “더 많이 움직여라.”라고 쓰여 있었다. 워낙에 정적인 데다가 책 읽고 글을 끄적거리면서 책상과 동고동락하는 시간이 늘었다. 한마디로 만성 움직임 부족이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남편에게 등산 데이트를 신청했다.    

  

북한산은 탈색한 나뭇잎들로 가을 정취를 물씬 풍겼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느낌은 맑은 공기와 어우러져 모히토를 한잔 들이켠 듯 청량함 그 자체였다. 그저 오르려는 목적으로 산길을 걸으면 금방 지치고 힘들다. 경치도 둘러보고 계곡물도 들여다보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주고받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다다른다.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기억이 온전치 못해.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요양원에 입원해. 그곳에서 당신을 잊고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아?”  

    

문득 책에서 읽은 <어웨이 프롬 허>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 내게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나는 남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남편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했다. 답을 정해놓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정작 나는 ‘남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남편은 영화 <장수상회>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수상회라는 마트에서 일하는 노신사 성칠이 동네 여인 금님과 썸을 타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둘의 만남을 지지한다. 알고 보니 마트 사장은 성칠의 아들이고, 금님은 성칠의 아내다. 성칠이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자,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둘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을 만든 것이다. 


“글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 사랑을 지켜봐 줘야 하지 않을까?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런데 시간이 좀 더 남았다면 다시 나를 기억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것 같아.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런데 영화 <장수상회>에서처럼 주위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인다 한들 과연 잊은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     

 

기억을 잊는다는 건 슬프다. 아픈 기억은 잊을수록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기억까지 지워진다는 건 나의 삶이, 내가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나는 어떤 기억이 지워진 걸 가장 마음 아파할까? 나일까? 아니면 아이들, 남편, 부모·형제, 친구?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테니 어찌 보면 그런 나를 바라보는 상대가 더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   

   

‘누죽걸산’이라는 말이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스갯소리지만, 그만큼 움직이는 게 건강에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운동이 답이다. 이렇게 틈이 나면 남편과 등산하고, 걷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니 탁탁탁 자판을 두들기며 사랑하는 이들과의 기억도 남기고.





#라라크루 #알츠하이머 #더많이움직여라 #어웨이프롬허 #장수상회

작가의 이전글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