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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19. 2023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가다


"인간은 광장을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 라느니 하는 소리는 당치 않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 최인훈, <서문>, 《광장》, 정향사, 1961




< 나의 문장 >


결혼을 하고 시댁에 갈 때면 나는 혼자 숨어들 밀실을 찾곤 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나 홀로 외딴섬에 떨어진 듯한 외로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온전한 내편이라 믿은 남편은 시어머니에게는 집안의 대를 이을 하나밖에 없는 귀하디 귀한 아들이고, 며느리는 아들을 살뜰히 챙기며 손자를 낳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남편 중심으로 돌아갔고, 세 명의 누나와 한 명의 여동생은 이를 지극히 당연시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두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시댁 식구들의 광장에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막내로 태어나 집안일에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 결혼과 동시에 한 집안의 장손 며느리 역할을 해내는 것이 늘 버겁기만 했다. 할 줄 아는 것은 없지만, 또 열심히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들이 늘 부대꼈고 힘겨웠다.


그렇기에 이십 년이 넘는 나의 결혼 생활은 선명한 사계절이 존재했다. 뜨거웠던 시절을 지나 결실의 계절을 맞이했다. 혹독한 겨울이 다녀갔고 봄이 길었다. 때로는 광장 앞 골목에서 달아나기도 하고 광장에서 혼자 꿋꿋이 버티기도 했다. 때로는 밀실로 숨어들어 홀로 울음을 토해내기도 하고 화를 삭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광장으로 나서는 골목을 하나둘 발견해갈 수 있었다.


어느 관계든 서로 부딪히며 모난 부분들이 둥글어진다. 물론 서로 맞추려는 의지와 노력이 전제할 때의 이야기다. 긴 시간이라는 육수와 경험이라는 주재료, 노력이라는 양념 덕분에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라는 요리를 좀 더 맛깔나게 완성하는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보다 빠르고 풍미 있게.


예전에는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길을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 골목길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유가 생겼다. 나이 든다는 건,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함께할 정과 믿음이 쌓였다는 것.   



#라라크루 #관계의요리 #광장과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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