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3개월 만에 만나니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느라 바쁘다. J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피곤해 보인단다. 어제 제사가 있어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보다고 했더니, 시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왜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제사를 지내지."
"요즘은 절에 맡기거나 지내지 않는 분위기던데?"
"응, 그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남편은 장손이자 외아들이다. 위로 누나 셋, 아래로 여동생 하나가 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제사를 모신지도 15년이 지났다. 일 년에 조부, 증조부 제사까지 명절 빼고 총 네 번의 기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고 말고는 남편이나 내가 독단으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조부, 증조부 제사는 우리가 지내지 않으면 문중 묘제로 올려야 하는데 그건 문중 어른들의 동의가 필요하고, 시부모님 제사는 형제자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남편과 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어느 시점에는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들에게까지 물려줄 생각도 없을뿐더러 물려준들 지낼지도 의문이다. 괜한 부담을 넘겨주느니 내 대에서 정리하는 게 맞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납득은 하지만,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금세 화제가 바뀌어서 다른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다 토요일에 내가 김장을 한다고 했더니 다시 난리가 났다.
"뭐 하러 힘들게 김장을 해? 엄마가 산 김치 택배로 보내줘서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어."
"야, 요즘 김치가 얼마나 맛있게 잘 나오는데? 사서 먹어."
"사서 먹는 김치 너무 감질나서...."
"한꺼번에 10kg, 20Kg씩 사. 내가 대량 주문하는 데 알려줄까?"
친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갑자기 너도나도 호통을 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김장이 힘든 일이긴 하다. 시어머님이 계실 땐 시댁에서 김장을 해서 가져다 먹었다. 돌아가시고는 엄마랑 김장을 했는데, 엄마도 힘에 부쳐해서 내가 직접 한 지 몇 년 됐다. 다행히 가족들이 맛있다고 하니 그 맛에 김장을 한다. 김장을 해서 김치 냉장고를 채우면 뭔가 부자가 된 느낌이다. 이런 내가 너무 고루한 걸까.
나와 삼십 년의 나이 차가 나는 상사도 내가 제사를 지내고 김장을 한다는 말을 하면 보수적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어가는데 나는 아직도 예전의 관습에 젖어 있는 걸까. 뭔가를 바꾸려면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몇 년 전 제사 음식을 간소화하겠다고 얘기했을 때도 시댁 식구들과 한 번 다툼이 있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해서 타협점을 찾았는데,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친구들은 바꾸려는 시도 없이 묵묵히 감당하는 내가 답답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는 몸도 약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김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여력이 되니 한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시점이 오면 자연스럽게 사 먹게 될 것이다. 제사는 한 집안의 장손 며느리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지난 추석, 시댁 식구들이 모였을 때 남편이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고 성묘 가는 걸로 대체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냈다. 큰 반대 없이 내년 추석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금씩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집 제사 문화도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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