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약속을 잡은 날이 하필이면 올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피해 볼 요량으로 지하철 역사와 연결된 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았다. 운 좋게 버스와 지하철이 바로바로 오는 바람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반대로 친구는 갈아타는 곳을 지나쳐서 좀 늦겠다고 연락이 왔다. 친구가 올 동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하 상점들을 둘러봤다.
때가 때인 만큼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품을 진열해 놓고 판매하는 곳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면 가판대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사람들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에서 틀어주는 노래로 인기곡과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겨울이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캐럴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구나, 를 실감하며 기분이 들떴었는데.
나의 행동반경이 좁아져서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때처럼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일이 많이 줄었다. 시간의 속도에는 민감하면서도 변화에는 오히려 둔감해진 느낌이랄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트리를 장식하고 선물을 준비하기에 함께 마음이 들뜨고 분주했었다. 지금은 ‘벌써 크리스마스구나. 일 년이 또 갔구나!’ 정도다.
아기자기한 트리 장식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재미를 오랜만에 맛보고 있는데, 한쪽에 흰 종이들이 잔뜩 걸린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고 다가가 보니 사람들이 손으로 적은 소망이 가득 담긴 카드가 걸려있다. 왠지 그들의 내밀한 사연을 몰래 엿보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들여다보았다.
“나는 날고 싶어요, 산타할아버지”
“OO에게 엄마가 생기게 해주세요”
“산타할아버지, 우리 집에 와주세요”
“정규직이 되게 해주세요”
“OO야, 그곳에선 행복하니? 네가 없는 세상은 행복하지 않다…”
포켓몬, 카카오프렌즈 문구 세트, 토끼 인형 등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써놓은 아이들 카드가 꽤 보였다. 수능 1등급이나 대학 입학 또는 편입 시험, 공무원 시험의 합격이나 솔로 탈출, 결혼을 기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늘나라에 있는 딸 또는 엄마에게 띄운 글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어린 아들이나 딸의 손을 잡고, 연인이나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왔을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글을 들여다보며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하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기도 했다. 카드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은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마음 한 귀퉁이에 나도 바람을 살포시 걸어본다.
‘지금처럼 가족 모두 무탈하게, 가끔 웃고 그것보다 적게 울고 많이 기뻐하고 조금만 아파하며 이따금 두려움이 찾아와도 떨치고 일어나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세요.’
크리스마스트리는 희게 빛났다. 사람들의 바람을 한아름 품고서.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2024년이 되기를 바라며….
#라라크루 #미리아듀2023 #어서와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