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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07. 2024

마음을 파는 노점상

    

우리 동네에는 할머니 노점상이 몇 군데 자리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같은 블록에 H마트가 있다. 그 옆 인도 한편을 차지하고 할머니가 찐 옥수수를 판다. 2~3개들이 한 봉지가 2천 원이다. 남편과 내가 옥수수를 좋아해서 종종 사다 먹는다. 엄마도 좋아해서 친정 갈 때면 여러 봉지를 산다.

“오늘 많이 사니 내가 덤으로 더 넣었어.”

인심도 후하다. 옥수수뿐만 아니라, 생화도 판다. 옥수수를 파는 손수레 옆에 벽돌색 고무통이 놓여있다. 통에 물을 채워 생화를 담아놓는다. 손님이 꽃을 주문하면 통에서 한 묶음 꺼내 신문지에 둘둘 말아 건넨다. 옥수수와 꽃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길 건너편에 L마트가 있는데 그 옆 인도에는 야채 노점상과 생선 노점상이 이웃해 있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생선 파는 나는 할머니에게 미리 조기와 민어를 주문한다. 그러면 큰 걸로 골라서 내장을 제거하고 생선 비늘과 지느러미를 손질한 다음 씻어서 햇볕에 적당히 말려준다. 며칠 후 생선을 찾으러 가면 잘 마른 생선을 봉투에 담아 준다. 가끔 주문한 후에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일도 있다. 

“어휴, 날씨가 흐려서 생선이 잘 안 마를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그래도 오늘 반짝 햇볕이 좋아서 잘 말랐네. 허허”

이렇게 할머니에게 내 걱정을 빚지기도 한다. 등을 채 펴지도 못하고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는 할머니의 모습이 힘겨워 보이지만, 눈이 마주치면 늘 반갑게 웃어준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그 앞을 지나가던 날이다. 

“늦었네. 생선 안 필요해요? 내일 쉬는 날이라 다 팔고 가야 하는데. 내가 싸게 줄 테니 가져가요.”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자르는 할머니의 손길이 바빠진다. 나는 계획에 없던 생선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또 집에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한 블록쯤 걸어가면 야채 파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길 건너 야채 노점상과는 파는 채소의 종류가 달라서 가끔 찾는 곳이다. 거기는 소위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다. 아침 일찍 손주들 학교 보내고 혹은 남편 밥 챙겨주고 슬슬 마실을 나온다. 할머니들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를 차지하고 앉는다. 야채 파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나물을 다듬는다. 한 번은 김치를 담가볼까 하고 총각무를 한 다발 샀다. 

“이거 어떻게 절이면 돼요?”

너도나도 앞다투어 설명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인 할머니가 영 미덥지 않은지 한마디 한다. 

“에이, 그거 뭐 어렵다고. 내가 절여줄게. 한 시간 있다 찾으러 와.”

총각김치에 들어갈 쪽파도 손질해서 팔고 있으니, 나로선 편하기 그지없다. 찹쌀풀을 끓이고 사 온 파를 씻고 마늘을 빻아 놓고 다시 가니 잘 절인 총각무를 건넨다.

“깨끗한 물에 한 번 씻어서 물기 빼고 담그면 돼.”

내가 치른 값에 비하면 황송한 친절이다.    

 

언제부터인지 옥수수 파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자식들이 그만하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에 ‘아, 그만두셨구나’ 했다. 제사를 며칠 앞두고 건너편 생선 파는 곳에 가니 할머니가 안 나왔다. 야채 파는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병원에 갔단다. 그 후로 몇 번의 쉼 끝에 더는 할머니를 마주할 수 없었다. 한 블록 너머에 있던 곳은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라 뒤늦게 할머니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유일하게 길 건너 야채 파는 할머니만 남아 있다.      


노점상이 있던 길을 지나칠 때면 가끔 그분들이 생각난다. 그 장소들은 내게 단순히 옥수수, 생선, 야채를 파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새벽에 몰래 다녀간 눈처럼 소리 없이 쌓이는 마음을 만나는 장소였다. 이제는 마주할 수 없는 분들이지만,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길 마음을 다해 빌어본다. 봄이 오면 길 건너 야채 파는 할머니에게 갓 캐온 쑥을 사서 된장 넣고 쑥국을 끓여 먹어야지.



#노점상 #마음을파는노점상 #정 #감성에세이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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