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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y 24. 2024

감성충전소


오늘은 저녁을 먹고 모처럼 걷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낮에는 여름처럼 더웠지만, 저녁이 되니 걷기 딱 좋은 날씨다. 한강공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강공원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다. 자전거 대여소는 아직 불을 밝히고 있고 자전거를 빌려 타는 이들이 눈에 띈다. 한강 가까이 난 길로 가니 걷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어둠에 가려졌던 잔디밭은 돗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로 시끌벅적하다. 서울 사는 젊은이들이 여기로 다 모인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한강으로 시선을 돌린다. 강 너머 아파트며 빌딩, 광고판이 뿜어내는 불빛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쏘아대는 조명이 강에 반사된다. 마치 여러 색의 불기둥이 흘러내리듯 현란하다. 고흐의 그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는 장관이다. 밝은 조명 뒤로 별은 숨어버렸으니 ‘한강의 조명이 빛나는 밤’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피부를 스치는 살가운 바람과 아름다운 조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음악 소리를 좇아 발이 움직인다. 마이크를 타고 들려오는 럼블피쉬의 <비와 당신>, 이어지는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버스커의 노래에 맞춰 지휘를 하는 사람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버스커와 한 팀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듯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백발에 청남방을 입은 외국인 할아버지다. 그는 마치 유명한 콘서트홀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혼자만의 세계에 심취해서 팔을 휘젓고 있다. 그들 앞으로 계단에 앉아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는 사람들이 있고 맨 뒤에서 한 외국인 남성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한참을 노래와 분위기에 취해 있다 꿈에서 깨어난 듯 나는 다시 걸음을 뗀다. 풀 향 가득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하며 걷다 보니 떼지어 계단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그 앞에 기타를 매고 노래하는 남자 둘. 내가 모르는 팝송이지만, 감미로운 선율이 가슴에 스며들어 아련함을 불러일으킨다. 색색의 조명을 품은 한강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내 마음을 파고들어 일렁인다. 노래가 끝나도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운동을 하려던 당초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어느새 한강공원에서 맞닥뜨린 풍경에 나는 동화되어 간다. 자유로이 젊음을 즐기는 청춘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 밤과 더불어 짙어지는 초록의 향기, 사람들을 유혹하는 버스커들의 감미로운 목소리, 화려한 불빛에 젖어 들어 일렁이는 한강의 자태. 한강공원의 밤은 살아있다. 이곳은 나의 감성 충전소다.   

  

힘껏 빨아들인 감성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돈다. 일상의 쳇바퀴를 도느라 잔뜩 굳어 있던 마음 근육들이 감성 스트레칭으로 유연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옅은 구름옷을 입은 달이 내 뒤를 따른다. 길가에 핀 장미꽃 향을 흠뻑 들이마신다. 향에 취한 듯 분위기에 취한 듯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자꾸 뒤돌아본다. 연인과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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