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그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하고 그가 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그 대답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뭐든지 상관없었던 거야, 내 경우는." 하지만 그 설명으론 그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 ......."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 내 경우는 지, 지, 지도가 좋아서 지,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거든. 그 때문에 일부러 도쿄에 있는 대학에 들어왔고, 매달 보내주는 하, 학비도 받고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그렇지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 ......"
그가 하는 말이 옳았다. 나는 설명하기를 단념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운전하는 동안 부모님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직접 운전하는 게 편하시겠지만, 그럼 목적지까지 곧장 가버릴 테지.
언젠가 한 번은 아버지와 담양에 다녀온 어머니께서 '다시는 자전거를 같이 안 타겠다.'라고 했다.
왜인지 묻자 '무슨 경치를 즐길 생각은 없고 목적지까지 질주했다가 도착하면 바로 돌아서서 출발점으로 쌩하니 와버린다.'라고 한다.
아버지 김철수 씨는 목표가 정해지면 최선을 다해 삶을 질주해왔다. 그의 앞날엔 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강한 책임감으로 일에 매진하며 회사가 확장되는 것에 기뻐했다. 회사가 곧 그의 삶이었다. 그런 삶이 가정을 지켰다. 많은 크고 작은 힘든 일이 있었지만 성공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한차례 큰 병을 앓고 난 후에 그는 삶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다.
먹고사는 것과 사회적인 성공에 급급하던 시간을 지나온 뒤에 비로소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찾는 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 세대가 일꾼 시대의 부유함 덕분에 스무 살의 어린날부터 내가 할 수 있었던 고민을 오십이 훌쩍 넘은 김철수 씨도 한다.
그는 부유하지 못한 집에서 태어나 온 동네 들썩이던 사고뭉치였다.
도끼, 참기름병 등 집에 살림을 엿 바꿔 먹기 일수였고, 급식으로 제공되던 빵을 먹기 위해 학교 창문을 넘어 들어갔지만 잠든 채 다음날 발각되기도 했다.
군대에선 매일이 사건사고였고 김장 탱크에서 가스에 질식해 기절하기도 했다.
다시 그런 어린 마음으로 돌아갈 시간인지도 모른다.
세월을 격하고 아버지와 내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사는 동안 어머니는 그 자리를 지켰다.
사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가장 강인하다.
천사 같았던 어머니는 철부지 아들과 남편으로 인해 강인해져야 했다.
운전 중에 생각들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떠오르고 사라진다. 그렇게 상당히 많은 시간을 갔다.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가 웃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나도 그의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다소 고지식한 셋째 아들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도를 만드는 것만이 그의 자그마한 인생의 자그마한 꿈인 것이다. 누가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차를 더 멈추면 오늘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도착 예정 시간이 자꾸만 늘어나서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차를 한번 세울 때마다 15분 30분씩 도착 시간이 늘어난다.
경치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고, 볼일 보고 그 모든 행복에 시간이란 대가가 필요하다.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지니 마음 한편에 숙소에 대한 불안감이 싹텄다.
에어비엔비를 예약했는데 호스트의 확정을 확인하지 못하고 출발했다.
위기감을 가진 이후로는 최대한 정차하지 않고 눈으로 아름다움을 담으면서 갔다.
혼자 7시간을 운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야생 동물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고 속도위반 벌금도 무섭기 때문에 절대 과속하지 않고 정속으로 운전해야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됐고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멈춰서 비켜줬다.
이런 도로를 수동 차량으로 움직였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지나치던 캠핑장 옆에 작은 마트를 발견하고 곧장 핸들을 틀었다.
와이파이와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은데 염치없어서 캔디와 핫도그를 사면서 물었다. 화장실이 먼저다.
자연을 사랑하는 노르웨이는 하나의 차선으로 차량이 오고 가고 화장실은 그 긴 여정 중 찾을 수 없다.
방광이 터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연에 죄짓는 기분으로 차를 멈추면 왜 그때마다 다른 차들이 지나가는지 난감했고, 깊은 숲으로 걸어가자니 왠지 무서웠다.
마트 지붕 밑에서 간신히 연결한 와이파이로 숙박 예약이 취소됐다는 알림을 확인했다.
오히려 확인하니 불안감이 가시고 홀가분하다.
백야로 해가 지지 않는 여름 노르웨이 자동차 여행의 장점은 유연한 일정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어느 것도 미리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개인의 일정도 넉넉하다.
이런 스타일로 여행할 수 있는 것에 긍정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당장은 숙박 어플에 숙박 가능한 장소가 보이질 않지만 목적지 부근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생각지 못했던 것은 내가 설정해둔 목적지가 산 위라는 것이었다.
한 시간째 차는 산으로 올라가고 어느 순간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유명한 장소 근처에는 마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
백야 현상이 무색하게 사위가 어둡다. 시야 가득 광활한 바위 산,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더 많이 내리는 비. 마치 나 혼자 타 행성에 온듯하다.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 첫날 산 위에서 고립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최후에는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껴입고 차에서 자려는 생각도 했다.
아까부터 틀어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어느 것 하나 미리 예약한 것 없는 일정이 주는 자유로움이 크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있다.
그래도 노르웨이에서 자동차 여행을 마음먹은 취지에는 이게 좋다.
내비게이션에 검색되지 않았으나 목적지였던 Kjeragboltn에 도착하니 불이 켜진 카페가 하나 있다.
두 시간 만에 처음 보는 불빛이다. 사람이 있다는 자체에 안도감이 몰려온다.
따뜻한 차를 한잔 시키며 숙소를 구할 곳이 있을지 물어보니 직원은 친절하게도 아래 마을로 가서 Olavs라는 펍에 요청하면 숙소를 안내해 줄 거라며 포스트잇에 펍 이름과 주소를 적어줬다.
포스트잇을 소중히 쥐고서 마을까지 운전해서 내려갔다.
여행지의 첫날은 전초전과 같다. 그 나라의 정보를 얻고 여행하기 위한 방법을 배운다.
노르웨이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구글로 검색한 이동 시간과 차량 내비게이션 결과가 다르고, 지명이 검색되지 않을 수 있고, 화장실을 가기 힘들고, 마을이나 식료품 가게도 드물고, 멈출 때마다 도착 예정시간이 늦어지고, 핀란드와 동일하게 백야로 인해 밤 10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마주오는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면서 서로 인사를 하는 것 등등등.
나는 아직도 여행을 배우는 중이고, 왜 여행을 시작하게 됐을까, 이 여행에서 무엇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Olavs Pub’ 도착하니 정말 방이 있고, 330kr에 예약할 수 있었다.
피오르드 협곡을 따라 바닷물이 여기까지 닿았다.
놀라운 경치와 트레킹 시작점까지 가까운 위치를 생각하면 너무나 근사한 숙박 장소다.
목조 주택에 침대가 여러 개 있는 구조(호스텔)이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음이 들리는데 이것이 노르웨이 여행의 낭만인 듯해서 좋다.
이 마을에 머무는 여행자들은 Kjeragboltn에 다녀왔거나 갈 예정인 사람들이다.
Kjeragboltn은 노르웨이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로 꼽힌다.
등산화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가진이들이 많아서 움직임이 무겁고 소란스럽다.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눈을 감고 있으면 4,285km의 PCT,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 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크인을 할 때 샤워에 대해서 언급하며 스페셜 뭐가 필요하니까 찾아오라고 했는데 온수에 대한 이야기였나 보다.
수건과 샴푸를 챙겨서 샤워룸으로 왔는데 특별한 코인을 넣어야 특정 시간 동안 온수가 된다고 적혀있다.
차가운 물이면 어떠나 싶어서 틀어보니 이게 산에 있는 호수 물을 끌어오는 건지 아주 깨질 듯이 차가운 물이다. 머리부터 깨졌다. 그래도 온몸을 관통하는 개운함이 좋다.
샤워를 마치고 맥주 한잔의 낭만을 누리기 위해 펍으로 갔다. 이런 날 몸에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
두 모금만으로도 술이 올라올 만큼 나는 알콜과 멀어져 있고 그만큼 운전이 고됐다.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10시간이 지나서 이곳에 도착한 셈이다.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노르웨이 정보를 재확인하며 일정을 수정하고 못 보낸 카톡 답변을 했다.
한줄기 빛 같은 와이파이를 붙잡으면 반가움이 일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없이도 잘 지내왔다.
2011년 내 생애 첫 스마트 폰을 구매하기 전까지도 나는 잘 지내왔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이 없다.
펍에 앉아서 하루를 모두 기록하려 했지만 지나간 상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순간마다 떠오른 생각들이 있었는데 운전하느라 제때 그것을 적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새로운 풍경과 경험으로 자극이 연속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색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글로 옮기고 싶은 내용이 툭툭 떠오른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숙소로 돌아와서 어제 사둔 라면(Mr. Lee)을 끓인 뒤 냄비째로 들고 밖으로 나왔다.
피오르드의 멋진 풍경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라면을 먹는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먹는 라면은 엄청난 행복이다.
어떻게 이철호 씨는 노르웨이에서 라면을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