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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스스로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

태국, 도전속으로

 그래 이거야.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거였어.

 치앙라이에서 첫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내가 정말 도전의 한 복판에 발 디뎠음을 실감한다.

 풀벌레들은 귀 옆에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울어대고 모기장을 뚫지 못한 모기들이 언젠가를 위해 숨어있다.

 누가 봐도 찬물만 나올 야외 샤워장과 이제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푸세식 화장실 건물이 붙어 있는데, 4칸이 일렬로 붙어있는 샤워장 안으로 들어가면 큰 대야에 물이 받아져 있다.

 그 물을 바가지로 퍼서 샤워할 때 써야 하니 물을 데울 방법도 데울 시설도 없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찬물만 나오긴 마찬가지이고, 부유하지 않은 곳에서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치앙라이가 태국에서도 북쪽에 위치해있고 이곳이 산속인 탓일까, 유독 샤워장에서 사용하는 물은 차갑다.

 특히 아침에 샤워를 할 때면 밤사이 더 차가워진 물에 각오를 하고 몸서리쳐야 한다.

 푸세식 화장실은 어디나 같아서 볼일을 볼라치면 자세와 냄새와 추스름의 고통이 있다. 

 배에 자극이 되는 것은 저녁에 먹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푹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움직이는 사람 중에서도 샤워를 하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아침저녁으로 씻어야만 하는 병에 걸린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씻지 않는 사람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침에 차가운 물을 끼얹는 것은 힘들다.

 몸서리치며 샤워를 마치고 옅은 안개가 낀 마당을 지나올 때쯤이면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서 엉기적거리며 식당으로 간다.

 이곳의 아침은 식당에서 시작되고 이후 한 시간이 가장 분주하다.

 아침 식사는 어느 것에도 타협하지 않은 태국 가정식이 준비되는데 뷔페처럼 차려진 음식을 차례로 급식처럼 식판에 덜어서 자리에 앉는다.

 나와 로버트, 엘리엇처럼 가리는 것 없는 친구들은 늘 한상이 푸짐하고, 향신료나 젓갈, 내장 요리의 꼬릿 한 향 등을 참지 못하는 친구들의 빈약한 식판엔 과일만이 가득하다.

 컵라면이나 빵 등을 준비해서 먹는 친구들도 있지만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4인이 앉을 수 있는 통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옆으로 붙여서 보통 8인이 한 테이블을 이루고, 그런 테이블이 여러 개 모여있어서 한 공간에 7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야외 식당이다.

 식당 천장에는 비 올 때를 대비해서 천막을 둘렀는데 그 모양새가 절묘해서 고개를 들어 보지 않으면 머리 위를 가린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둘러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잡담하며 밥을 먹고 있을 때쯤이면 기어이 눈에 잠을 달고 있던 친구도 잠에서 깨고 만다. 

 그쯤이면 니키가 자리에 일어나서 이목을 집중시킨다.

 큰 키에 다부진 입매,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늘 쾌활한 인사로 말문을 열고, 곧이어 오늘의 봉사 일정과 봉사자 현황을 공유하고 이슈를 확인 한 뒤 봉사자 또는 스탭 중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에게 다음 바통을 넘긴다.

 바통을 넘겨받은 이들의 유쾌한 농담으로 함께 웃고 환호하는 일이 다반사지만, 때때로 떠나는 봉사자가 일어나서 그동안의 소감과 감사를 전한다.

 그가 떠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 서서 그리운 얼굴을 하면 모두가 박수를 보내며 농담을 하여 그리울 것에 화답한다.

 나는 베트남을 떠난 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여행 한 뒤, 한번 더 봉사를 하기 위해 태국 치앙라이 산속에 위치한 봉사자 캠프로 들어왔다.

 더 도전적인 과제, 더 도전적인 상황 속으로 나를 데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치앙마이로 가는데 나는 치앙라이 산속으로 왔다.

 방콕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오는 동안에도 아주 소수의 여행자만 있었다.

 특히 다른 나라에서 방콕을 경유해 치앙라이로 온 사람은 단 둘 뿐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나를 포함한 다른 여행자의 수화물만 엉뚱한 곳에 분류되어 공항에서 한차례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됐다.

 아주 작고 허름한 치앙라이 공항은 비행기에서 내려오면 바로 출구에 가까웠고, 마중 나온 차는 치앙라이 시내를 지나쳐서 외진 길로 깊숙이 이동했다.

 비포장 도로를 지나 차가 끝내 멈춰 선 숲 속에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봉사 단체가 있었다.

 산 어귀 일부를 평탄하게 정리하고 그 위에 나무와 흙으로 지은 몇 동의 건물이 숙소와 회의실 역할을 하고 있다. 

 야외 식당과 샤워장, 화장실, 오두막도 있다. 

 이곳이 앞으로 내가 2주 반 가량 머물 장소다.


 나에게 배정된 숙소 건물은 가장 안쪽에 있어서 크지 않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하고 마당 좌우로 샤워실과 화장실 그리고 숙소 건물이 있다.

 30년 전 한국 시골에서 볼 수 있던 집들만큼 자연 친화적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넓게 뚫린 한 공간에 파티션을 가운데 두고 침대가 4개씩 늘어서 있고 침대마다 모기장을 드리웠다.

 밖에서 보면 산비탈의 시골집이고 내부를 보면 전쟁영화에서 보던 군 막사와 흡사하다.

 스탭이 내가 지낼 숙소라고 이 건물을 가리켰을 때 나는 속으로 '그래 이거야.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거였어. 이게 낭만이지'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에서는 교실을 운영하는 선생님이 있고 아이들이 그 수업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는데, 이제는 봉사자들과 의논하여 수업 내용과 방법을 정하고 필요한 교보재도 챙겨서 직접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봉사의 경중이나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 자체는 더 도전적이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도심에 숙소와 봉사지가 있었기에 봉사 외 시간에 자유롭게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이곳은 치앙라이 시내에서 차를 타고 산중에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야 봉사자 거점이 있다.

 봉사자들은 주말을 이용해서 외박할 수 있고, 봉사를 나갈 때와 외박을 갈 땐 봉사지에서 운행하는 트럭을 이용해야 한다.


 니키는 이곳을 설립 후 운영하고 있는 봉사 단체 대표이자 리더다. 

 영국인인 그녀가 왜 이곳에 봉사의 뿌리를 내렸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치앙라이 주민들의 생계 자립을 위한 기초 영어 교육과 지역사회를 위한 노력봉사 활동이 이곳의 존재 의의를 말해준다.

 눈을 뜬 사람과 뜨지 못한 사람도 아침에 식당으로 찾아와 봉사를 가기 위한 힘을 비축하는데,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니키가 식당에서 전체 공지와 일정을 안내하고 떠나는 친구들과 발언이 필요한 사람들의 말도 모두 이곳에서 듣기 때문에 와야 한다.

 식사가 끝나면 차량 탑승 시간에 맞춰서 봉사 갈 채비를 마쳐야 하므로 바쁜 움직임이 시작된다.

 시설을 정비하거나 농사를 돕기 위한 이들은 삽과 작업복, 장화를 챙기고, 아이들 돌봄 봉사팀과 교육 봉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회의실에서 교보재를 챙기고 필요한 경우 짧은 회의를 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팀별로 준비된 차 뒤에 올라타서 출발을 외친다.

 보통 3대의 차량이 봉사지로 이동하는데 노력 봉사팀이 걸어서 이동할 때도 있다. 

 어쨌든 봉사자들이 캠프를 떠난 아홉 시 무렵엔 적막이 찾아온다.


 첫날, 이런 분주한 아침 시간에 도착했던 탓인지 반겨주는 이 하나 없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어수선했다.

 스탭 안내에 따라 캠프를 둘러보고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이동한 곳엔 20명가량의 신규 봉사자가 모여있었다. 

 미국, 멕시코, 프랑스,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봉사자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느낌은 굉장했다.

 책자가 배포된 후 오리엔테이션은 지체 없이 시작됐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서구권에서 왔고 영어 사용을 전제로 참여하는 곳이기 때문에 봉사 리더에 의해 빠른 영어로 진행됐다.

 정말 많은 내용이 귀에서 튕기고 흘려나갔다.

 그나마 태국 현지의 스탭이 설명할 때는 발음이 분명하고 어휘가 정직해서 상황이 나았다.

 봉사 기관에 대한 설명과 태국 문화, 치앙라이 환경, 봉사자 유의 사항, 봉사팀 별 상세 설명 등 오리엔테이션은 꽤 긴 시간 동안 전문적으로 진행됐고, 문답 시간도 사이에 있었지만 그저 보고 듣기에 바빴다.

 생각보다 더 체계적이고, 봉사 참여와 진행을 위해 영어 사용이 중요한 상황에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만 커져 마음이 슬렁했다. 

 걱정이 도전의 설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오리엔테이션이 마무리된 4시쯤엔 외부에 나간 교육 봉사자들이 복귀했고 관련자들과 함께 회의실로 이동하여 회의를 참관했다.

 나처럼 단기 봉사자가 많은 탓에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즉시 봉사에 투입할 수 있도록 짜인 프로세스가 굉장히 좋았지만 슬렁한 마음이 연이어 분주하고 추슬러지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 봉사(childcare), 다양한 일손을 돕는 노력봉사(Outdoor), 그리고 영어 교육 봉사(Indoor) 3가지 활동을 한다. 

 나는 사전에 교육 봉사를 신청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서도 교육봉사에 신청한 것이 민폐라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하지만 내가 교실에서 수업할 내용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라 괜찮다고 했다.

 교육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매일 봉사지에서 복귀 후 전체 회의를 갖는데, 회의는 니키가 주도하고 오늘 봉사 중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보완할 부분 등을 팀별로 또 개인별로 보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소감을 묻기도 했다.

 놀면서 하는 대화는 부족한 영어로도 즐거운데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런 영어로도 교육 봉사를 하겠다고 앉아 있다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모든 봉사 중에 교육봉사 인력의 수가 가장 적은데 그중 동양인은 없었다.

 나중에 친해진 봉사자들(대만, 중국, 한국, 말레이시아 등지 온 봉사자들)에게 물어보니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에 부담도 있지만 이렇게 회의, 보고, 피드백, 교육 준비 등 언어로써만 진행되는 것이 많기에 부담된다고 했다. 

 교육에 도전했다가 노력봉사로 전환한 봉사자도 있었다.

 나 역시 오리엔테이션과 회의 참관 중에 그런 부담을 느꼈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나에게 발언권이 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들 앞에서 영어를 뱉어야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세계여행으로 한국을 나온 뒤 처음 느낀 감정이다.

 다만 이 부담과 압박에서 도망하고 싶진 않다. 

 버티고 있어야 이 산골에 찾아온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혼자 나왔지만 어느새 또 사람들 틈에 서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심하고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 세계여행이다.

 불과 몇 달 전 인천공항에 서서 혼자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던 때가 있었다.

 기약이 없는 긴 시간의 여행, 가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세상, 짜여있지 않은 일정으로 자고, 먹고, 이동해야 하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고, 그 자리에 있기까지의 내가 그 뒤에 서있었다.

 공항으로 배웅 나온 재훈이가 없었다면 나는 그 먹먹하고 막막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공항에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이 기대되면서도 무섭고, 결단에 마음이 후련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켜 벅차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혼자에 대한 생각을 하면 늘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의 내가 떠올라 애잔하다.

 중요한 순간에 나는 늘 혼자였다.

 형제자매는 없었고, 부모님은 건강과 재정, 미래에 짓눌려 주변을 볼 틈이 없었다. 좋은 벗은 많았지만 가치관을 나누고 이해받을 이가 드물었고, 그런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꺼내야 할지 모를 만큼 나조차 혼란스러웠다. 

 때론 누군가에게 내 말을 건네는 것이 그를 설득해야 하는 것처럼 돼버려 피곤했고, 내 가치관을 지켜나가기 급급했다.

 스스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에겐 내가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세계여행을 하는 중의 경험이 귀하지만 그보다 여행을 결정하기까지 고민하고 방황하며 끝내 결단한 그 시간들이 더 귀하다고 생각해서 여행의 시작을 늘 되새긴다. 

 이때의 과정이 내 세계여행을 단단한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다.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며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 멋지다며 응원해주던 아빠 옆에서 소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흙빛이 된 엄마의 얼굴도 늘 기억에 간직하고 있다.

 가족 간에도 각자가 가진 삶의 방향과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방향은 다르지만 엄마는 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내가 가는 길과 방황이 내가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게 엄마의 행복이 될 것도 믿어야 한다.

 크게 지지받지 못해도 어쨌거나 내겐 가족뿐이다.


 엄마는 늘 전화를 끊을 때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아들아 다 잘 될 것이다.” 수화기에서 멀어지는 혼잣말이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워왔다.

 서울에서 수술 후 경과를 확인하고 나오던 광화문 길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대화를 마치고 끊으려던 그 전화기에서 “아이 좋아라” 하는 소리가 멀어지며 작게 들렸다.

 광화문 대로를 건너는 그 횡단보도 길 위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아이 좋아라’ 그 혼잣말이 너무 따뜻해서 우두커니 선채, 이제는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그 말을 따라 했다. “아이 좋아라.”

 내가 아무 이상 없어서 우리 엄마는 좋다. 나도 좋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많은 순간들 역시 엄마의 행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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