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 6월 초

by 김창훈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지난 계절 일기 이후 흐린 날이 있었고, 주말엔 한 여름 같은 무더위가 이따금 스쳤다.

서울의 더위는 아직 여물지 못해서 한줄기 바람이나 그늘에 쉬이 가셨다. 해가 뉘어가면 곧장 서늘했다.

요 며칠은 봄과 가을 같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청명했다.

대기 중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선명하고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해가 저물고 어스름이 맴돌 때쯤 한강다리의 불빛과 한강에 비친 빛이 찬란했다.

양쪽 한강변을 달리는 차들의 밝은 전조등과 붉은 후미등, 빌딩 어딘가의 백색등, 노랗거나 주황색의 가로등 불빛도 모두 선명했다.

적당히 달리면서 그러한 풍경을 둘러보다가 벤치에 앉았을 때 반대편 여의도 야경이 화려했다.

엄마는 이곳에 앉았을 때 서울 같다는 말을 했다.

강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지만 강 위에 세운 건축물은 다리가 유일한 탓에 강폭만큼 시야에 거리낌이 없었다.

틔인 시야로 먼 곳의 불빛들과 그 빛이 강물에 반사되는 것을 함께 눈에 담고 있으면 하염없이 시간이 지났다.

하지를 앞둔 일몰과 이후 박명은 여간해서 끝나지 않았다.

희뿌옇게 밝은 빛이 남아 완전히 어둡지 않다.


큰금계국과 개망초가 여기저기 피었다.

이번에도 검색 끝에 알게 됐다.

들꽃으로 여기며 이 정도 세월을 보냈으면 이름쯤은 알아야겠다 싶었다.

큰금계국은 작은 해바라기 같은 노란 꽃이다.

최근 2주간 사방에 피어 가장 눈에 띈다.

도로변, 잔디 위, 풀숲 등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는데 일부러 조성한 곳도 있어서 못 보기 힘들다.

큰금계국이 절정의 시기를 갖는 동안 한 박자 늦게 개망초가 폈다.

이 역시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다.

큰금계국이 저들끼리 적당한 간격을 두고 피었다면 개망초는 대중없이 떼로 폈다.

흰 꽃잎과 노란 중심부가 계란프라이 같은 이 꽃은 서울의 오늘까진 아직 만개 전이다.

곧 큰금계국의 노란 물결을 밀어내고 사방이 희게 될 것이다.

어쩌다 핀 들꽃들인 줄 알았더니 안 핀곳이 없다.

언제부터 이 시기에 이 꽃들이 계절의 일부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6월에도 장미는 여전히 피었다.

장미는 길가에 무작위로 피기보단 누군가에게 심겨 조성된 경우가 많아서 주거지역에서 더 자주 본다.

적은 분포에도 그 선명한 색과 형태는 쉽게 눈에 띈다.

이러나저러나 화려함은 장미를 넘어서기 힘들다.

눈을 못 뗀 이들이 자연스레 이끌려 그 앞에 선다.


등갈퀴나물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눈에 띈 몇몇은 시들거나 잔뜩 풀이 죽었다. 그대로 안녕을 고한다.

더운 계절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시간의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왠지 힘이 빠져 발걸음을 돌렸다.

선거와 현충일로 학교나 회사에 가지 않은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왔는지 동네는 북적였다.

망원동의 시장, 소품 가게, 카페들과 식당엔 안팎으로 사람이 많았고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어 도로와 실내의 경계가 모호했다.

실내에서 맴돌았을 백색 소음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채널을 바꾸듯 들려왔다.

잠깐 발을 걸치고 의자에 앉으면 테라스 석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꼬치구이를 맛볼 수 있다.

걸음이 멈춘 사거리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바뀌며 사람들이 쏟아졌다. 엄청난 활력. 힘이 빠질 틈이 없다.


'살구나무'라는 팻말에 고개를 들어 나무를 살피니 초록 열매가 달렸다.

이게 나의 여름의 풍경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할머니 두 분이 곁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서로 "살구나무 꽃 못 봤어? 엄청 예뻐" 하신다.

못 봤다. 억울하다.


이번엔 음악이 아닌 책. 마쓰이에 마사지 작가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지난해 여름내 품고 있던 책. 활자에서 여름을 느낄 수 있다. 짙은 녹음과 습기, 숲, 목조 건축의 향기, 장작, 여름의 시간들.


*소나무엔 초록의 솔방울이 맺혔다.

*박명 :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빛이 남아 주위가 희미하게 밝은 상태.



tempImagerAULCq.heic
tempImageiqvGpI.heic
큰금계국
tempImageYPJsGu.heic
tempImageyNakfq.heic
개망초와 장미
tempImageNVcxtV.heic
tempImagetPLyOs.heic
살구와 솔방울


매거진의 이전글바람 한 줌 불어도 거대한 생명력이 요동하는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