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 백일홍

가을, 9월 초

by 김창훈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 윤하'

'Last Call - Jamie Miller'

'환승입니다 - 스텔라장'


며칠 전 비 내리는 것을 보며 라디오를 켰다.

DJ의 말이 끝나고 노래가 나왔는데 좋았다.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다는 게 참 좋았다.

볼륨을 높이고, 낯익은 목소리에 누군지 가늠하며 숨죽였다.

점차 빗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귀 기울여 들었다.

그 노래가 윤하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다.

나중에 멜론에서 곡을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시 들어보니 꽤나 날것이다.

분리 없는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서 실제 공연과 동일하게 원테이크로 진행된 앨범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듣기 위해 플레이리스트를 꾸려뒀지만 요 며칠 이 노래를 듣는다.


커피를 정성스럽게 내려 담은 뒤 산책을 나섰다.

더위와 변덕스러운 날씨에 자연스럽게 줄어든 산책이 여전히 덥지만 내려앉은 가을이란 계절에 다시 늘었다.

아직 반팔에 반바지를 입는 게 자연스럽다.

옷에 걸리지 않는 팔과 다리는 움직임이 자유롭다.

그 정도 저항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경쾌하다.

일부러 꺾어 들어간 골목길에 늘어진 능소화는 여전하다. 여전하다는 것을 보기 위해 지나간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습한 날이구나 하며 어느새 베어드는 땀을 느낀다.

걸으며 뜨거운 커피를 한두 모금씩 마시니 몸 안에 온도가 높아진다.

움직임에 만들어진 열이 커피와 함께 증폭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열기를 내린다.

바람은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다.

아마 습기로 인해 무거운 공기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걷고, 멈춰서 커피를 마시길 반복했다.

희우정로 길에는 낙엽이 가득했다. 벚꽃나무 밑은 어디든 그랬다.

어제도 쓸어낸 낙엽이 다시 나뒹구는 것은 아닐터인데 나무에 얼마나 많은 잎들이 겹겹이 쌓였던 건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이전보다 적어진 건 분명한데 이만큼 떨구고도 아직 한참이다.

흰 꽃 앞에서 걸음을 오래 멈춘다.

흰 배롱나무 꽃.

원추상의 꽃이 차례로 피어 100일 동안 볼 수 있다고 해서 '백일홍나무, 목백일홍'으로 불리는 이것은 진분홍 꽃이 익숙하지만 이처럼 흰 것도 있다.

백일홍 백일홍 백일홍 배롱. 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르면 7월부터 늦가을까지 꽃을 피우고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는데 줄기를 긁어보진 못했다.


라디오 채널을 바꿔가며 듣던 중 어떤 채널에선 오래된 노래들이 연달아 나왔다.

흥얼거리다 보니 흘러나온 곡들이 청취자들의 인생곡이란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곡과 추천하는 이유를 가만히 듣다 보니 사람의 이야기다.

DJ가 여러분의 인생곡은 어떤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이군요라고 한다.

이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시절에 대해.


한강공원까지 내친김에 간다.

등은 땀에 젖었고 손에 든 텀블러는 거추장스럽다. 몸은 열이 올라 유연하다.

새빨간 꽃이 피어 다가가보니 동백꽃이거나 그것을 닮았다.

늘 장미가 피던 곳에 있어서 긴감인가 하며 동백이 이때 피었던가 한다. 피는 것에 대중없다.

꽃이 눈에 들어오는 날이라 피어있는 것마다 다가가서 보니 큰금계국은 아직도 피어있고 편의점 사장님이 텃밭을 꾸려 키우는 호박넝쿨에 노란 호박꽃도 피었다. 샛보라 나팔꽃도 아침 햇살에 여기저기에 피어 예쁘다. 민들레도 있다. 무궁화는 한창이다. 한강변의 능소화는 여전히 피었으나 더 이상 피지 않는 것도 있는지 드문 하다.

오래전 피었다 진 줄 알았던 것들을 다시 보는 반가움.

몇 번을 다시 피는 것과 뒤늦게서야 피는 것들이 있다.


덥다. 그래도 더위가 지속되는 게 좋다.

오늘도 내일도 덥다는 말이 반갑다.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절기에 따라 계절도 앞으로 가는데 그렇게 앞으로만 가는 시간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게 아쉽다.

누구보다 일찍 가을이 왔노라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리 쉽게 여름을 또는 하나의 계절을, 어떤 시기를 흘려보낼 수 없어 미련을 잡는다.

적막함 가운데 귀뚜라미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내려앉았다가도 멤 멤 하는 매미소리가 들려오면 안도감이 찾아온다.

아직이구나. 아직 여름의 무언가가 남았구나 하며.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절이란 말은 일반적으론 지나간 어떤 시기를 일컫는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떠올리는 기억.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수많은 시절들은 멀리에만 있지 않다. 이번 여름도 어느새 과거가 됐으니.



마침 비가 와서 Jamie Miller와 스텔라장의 노래도 함께 묶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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