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3월 중순
'지나는 마음에게 - 크르르'
'STAY YOUNG - 임지우'
봄이 되면 미나리를 떠올린다.
미나리의 기억은 입에서 온다.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단연 미나리 초무침이다.
여간해서 뚫기 힘든 그 새콤한 양념 사이로 미나리의 향이 뚫고 들어온다.
오징어나 홍어 같은 것과 함께 버무리기도 하는데 남들이 그것을 탐하는 동안 나는 미나리를 집는다.
입에 넣으면 그게 봄 맛이다. 내겐 그렇다.
다음은 오리탕에 넣어 먹는 미나리다.
오리탕은 사실 미나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애정하는 영미오리탕에서 그것을 알았다.
수북이 쌓은 미나리는 국물에 풀어헤쳐져 충분히 값진 맛이었다.
20일은 절기로 춘분이었고 이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졌다.
춘분이 되기 이틀 전엔 비가 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보기에도 달았다.
식물은 이것을 부담 없이 흡수하고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비가 그쳤을 때 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산수유, 매화, 개나리, 목련이 피었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3월 12일 - 최저 2도 최고 13도 구름 일출 06:46 일몰 18:35
아침 한강변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와 미세먼지가 다르다는 것을 농밀한 안개를 통과하면서 알았다.
안개는 입자의 서늘함이 곧장 느껴지고 지저분하지 않다.
이맘때가 되면 혼자서 벚꽃이 언제 필 것인가에 대해 예측하는 놀이를 한다.
이보다 빨리 시작해서는 불확실성이 너무 높다.
내게는 별다른 예측 도구가 없어서 직접 눈으로 본 것과 근접한 일자의 날씨를 기록해 둔 과거 몇 해의 데이터를 비교하며 맞춰간다.
나무를 계속 올려다보면 중순이란 기간에 적당한 불확실성으로 즐겁게 예측할 법하다.
중순이 지나면 예측보다 확정된 사실에 너무 가깝다.
사실 언제든 어쩌든 예측이고 확률이다.
일기를 예보하듯 사람이 자연의 변화를 완전히 읽을 수 없다.
당장 내일 내게 일어날 일도 알 수 없듯.
가지는 계속 뻗고 가지마다 몽우리가 계속 분화한다.
기둥에 곧장 맺힌 몽우리는 갈색의 껍질 없이 초록껍질이다.
이것들이 주로 먼저 핀다.
매창에 월상하고 죽경에 풍청한제 -
풀어서 쓰기를 '매화 핀 창가에 달이 떠오르고 대나무 우거진 길에 바람이 맑다.' 하는 시조를 신문에서 봤다.
3월 중순의 봄날이란 이토록 간략하고 선명하게 말할 수 있다.
#3월 13일 - 최저 1도 최고 13도 맑고 시야 좋음 일출 06:45 일몰 18:37
연일 아침 공기가 차고, 낮에는 10도를 상회하는 날이 반복됐다.
찬 공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대체로 미세먼지 없는 날과 같아서 시야가 좋다.
여태 구름 낀 날이 많았으나 구름이 끼었다고 다 흐린 건 아니었다.
사방으로 뻗은 벚꽃 나뭇가지와 그 가지에 많은 몽우리는 아직 불 밝히지 않은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같다.
계속 보니까 가지 형태가 눈에 익어서 어디든 잠깐 스쳐 지나갈 때도 벚꽃나무를 발견한다.
#3월 14일 - 최저 2도 최고 12도 흐리지만 시야 좋음 일출 06:43 일몰 18:37
희우정로의 벚꽃 몽우리는 아직 갈색 껍질을 벗지 않고 내실을 다지고 있다.
유별나게 따뜻한 날은 없지만 낮의 온도가 10도 이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변이 적은 해가 될 것 같다.
아쉬운 건 너무 많은 가지가 잘렸다.
여러 해 동안 이 정도로 가지를 많이 잘라낸 적은 없었다.
이유야 있겠지만 굵은 것도 꽤 잘린 탓에 마음이 아프다.
목련은 흰 솜털 뭉치가 충분히 영글었다.
어디에서나 흰색의 촛불이 밝혀진 것 같이 예쁘다.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변의 키 낮은 목련은 솜털 끝이 갈라지며 흰 입을 내었다.
#3월 15일 - 최저 3도 최고 12도 흐리고 맑고? 일출 06:42 일몰 18:38
날이 흐려 채도가 낮은 아침에 산책을 나섰다.
저 멀리 강변에 선 버드나무가 아무리 봐도 연두인 거 같아서 다가갔더니 과연 가지마다 아주 조금씩 연두색 여린 잎이 났다.
그래 이젠 잎이 난 게 맞지.
갈색인 듯 회색인 듯 연두색인 듯. 강변의 버드나무 잎이 피었나 싶어 다가간 게 벌써 지난 한 달간의 일이다.
땅으로 늘어진 가지에 견과류 같은 게 달려있던 것이 잎이 될 것이었나 보다.
그 견과류 같은 껍질이 벌어지며 연두 잎이 났다.
아주 가까이서 그것을 확인한 뒤에 뒤로 물러서니 이것뿐 아니라 시야에 있는 모든 버드나무과는 연둣빛이다.
이제 더 이상 혼란 없이 연두색을 본다.
#3월 16일
라떼와 뱅오쇼를 샀다.
양손에 들고 산수유가 핀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통통한 검은 고양이를 봤다.
사람의 손을 탔는지 내 곁을 맴돌다가 다른 사람이 지나가자 또 그 사람 곁을 맴돈다.
#3월 17일 - 최저 3도 최고 14도 흐리고 미세먼지 일출 06:39 일몰 18:41
희우정로 벚꽃은 다음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대부분 몽우리가 초록색을 드러낸다.
이 몽우리가 분홍빛으로 드러나면 개화가 임박한다. 아직은 아니다.
개나리는 피었으려나. 산책로에 없어서 알 수 없다.
매화와 산수유는 피었다.
매화를 벚꽃으로 오해해도 좋다. 그럼 벚꽃을 한 달이나 즐길 수 있다.
땅에 가깝게 핀 매화는 혼란스럽지 않은데 나무 위에 높게 달린 매화는 벚꽃과 흡사하다.
매화는 가지에 붙어 난다.
벚꽃이 다음 단계를 맞는 동안 모든 식물도 그만큼 한걸음 나갔을 거라 추측한다.
은행나무는 가지 마디마다 무언가 돋아났다. 뭉뚝한 고딕체.
은행나무의 시작을 살펴 본일이 없으나 저것이 잎이 되나 생각한다.
날이 온화하다 생각하자 어김없이 미세먼지가 닥쳤다.
강 건너를 보니 시야에 관악산은 없고 여의도의 큰 빌딩 정도만 보인다.
그마저도 윤곽이 또렷하지 않다.
바람이 불지 않고 강은 고요했다.
그럼에도 물살이 눈에 보여 이상했는데 그게 다 새였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이긴다.
끝까지 친절한 사람이 이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3월 18일 - 최저 6도 최고 11도 흐리고 비 옴 일출 06:37 일몰 18:41
적절한 타이밍에 비가 오고 낮 온도는 꾸준히 10도를 상회하니 식물들의 성장에 걸림 없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꾸준히 나아간다.
최저 온도가 이제 점차 올라가며 일교차 마저 줄어드니 3월 후반엔 크게 탄력 받을 테다.
신문에 "하지 않는 일이 한 가지는 있어야지요"라는 문장을 곱씹고 있다.
새해가 된 이래로 무언가 하나는 해야 지란 생각에만 사로 잡혀 있었던가.
비는 무섭게 생장을 촉진했다.
시기에 맞는 공급은 이토록 달다.
하긴 집에서 키우는 식물도 물을 주면 처지던 잎이 곧장 위로 들리며 살아났다.
내게도 비와 같은 적절한 공급이 필요하다.
#3월 19일 - 최저 6도 최고 11도 흐리고 비 옴 일출 06:37 일몰 18:41
산책길의 목련은 기어이 피었다.
와이지 연습실 근처의 목련 나무를 습관처럼 올려다보다가 그 끝이 벌어진 것에 함박웃음 짓는다.
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으려 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도 올려다본다.
내 시선의 끝을 따라가면 피어난 목련이 있다.
목련이 오늘 피었다기 보단 핀 것을 오늘 본 것이 맞다.
허다한 목련 나무 중에 여기에 핀 것을 매해 소중히 여긴다.
피지 않은 목련나무의 흰 솜털뭉치는 부풀만큼 부풀었다.
개인적으론 이때와 막 잎이 나올 때가 예쁘다.
차를 타고 강변북로 위를 가다 서다 하는 중에 보니 한강에 뜬 새들이 주르르 서쪽으로 간다.
내가 동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새가 서로 간다.
그래서 이런 정체길에도 시야에서 빨리 멀어진다.
새는 망원 쪽에서 점점 더 많이 보인다.
며칠 전의 발견 이후로 버들나무들은 견과류 같은 껍질을 벗고 여린 잎을 더 많이 냈다.
덕분에 양쪽 강변은 모두 연두다.
특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쪽 한강이 풍성한 연두띠를 둘렀다.
비가 땅으로 먼지를 누르고 이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서늘한 공기가 유입됐다.
시야가 좋아서 여의도의 빌딩선이 선명했고, 저 멀리 아직 여명이 남은 하늘 아래 관악산의 윤곽이 또렷했다.
여의도 상공엔 풍선이 떴다.
#3월 20일 - 최저 2도 최고 13도 맑음 일출 06:34 일몰 18:43
춘분.
일출이 정말 빨라졌고 일몰이 정말 늦어졌다.
그럼에도 이제 낮과 밤이 같을 뿐이다.
더 빨라지고 더 늦어진다.
마냥 뛰어놀던 아이 때는 늘 낮이 짧아 아쉬웠다.
얼른 자야 아침이 다시 와서 밖으로 나가 뛰어놀 수 있었다.
잠드는 것과 다시 아침이 오는 게 늘 즐거웠다.
이제 희우정로에 양쪽으로 늘어선 벚꽃나무를 일직선으로 보고 있으면 어지럽다.
수없이 뻗은 나뭇가지와 그 가지마다 매달린 많은 몽우리들이 겹쳐서 뿌옇다.
꽃잎이 먼저 피는 나무라 어디에선가 첫 벚꽃 잎이 피면 곧장 세상이 어지러울 것이 상상된다.
이제 기둥의 몽우리는 분홍색을 드러냈다. 꽃잎이 피기 전 최종형태다. 물론 개화는 조금 더.
기둥에서 첫 벚꽃 잎이 피고도 여타 가지의 몽우리는 이틀즈음 더 있어야 첫 꽃잎이 핀다.
그것도 첫 것의 이야기다.
나무마다 최초의 꽃잎이 피고도 한주는 더 있어야 제법 볼만한 상태가 된다.
그때로부터 볼만한 벚꽃의 시기를 10여 일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추천곡은 크르르와 임지우의 곡.
+ 학교 담장, 차도의 가드레일 뒤에 핀 개나리를 봤다.
노란 건 산수유와 마찬가지인데 등장하자마자 자기주장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