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증기기관차 여행기를 읽다가 한국 V,O트레인이 떠올랐다
무리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 증기기관 열차인 SL열차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으며 실제로 달리는 걸 본적이 없어서인지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증기기관차가 갖는 정서와 이미지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애써 머릿 속에 떠올려 보지 않아도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논리야 반갑다'나 페리카나 치킨 광고가 나오면 무언가 마음을 톡 건드리고 가는 것처럼,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이건 도통 머리로도 잘 떠올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책이나 티비로도 자주 본 적이 없거니와 본 적이 있더라도 박제가 돼서 동상처럼 서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차'라는 말은 마음이나 뇌 그 어떤 것도 건들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죽은 말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성의하게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그것이 어떤 옛것에 대한 정서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내가 했던 비슷한 기차 여행이 떠올랐다. 몇해 전 늦은 봄과 이른 여름 사이, 나는 경북 영주시에서 출발해 강원 태백시까지 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 트레인에 올랐다. 기차를 수단이 아닌 목적을 갖고 탄 건 처음이었다.
다양한 모습의 여행 중에 왜 나는 기차 여행을 선택했을까. 그건 내가 간이역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 자동차보다 기차가 친숙하고 우연히 알게 된 가장 느린 열차, 경전선 때문이었다. 경전선은 1905년 경남 밀양 삼랑진~마산 구간 첫 개통을 시작으로 1968년 광주를 종착지로 완공된 300km 길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유일한 철도였다. 하지만 이 길은 경사가 심하고 S자 곡선이 심해 기차는 언제나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느릿하게 달렸다.
아니, 애초에 이 철도는 빨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길도 없는 마을과 마을을 잇고 그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발이 되고 귀가 돼 주는 게 이 길이 탄생했던 이유였으리라. 하지만 이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났고 화려한 KTX의 등장에 경전선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갔다. 작은 간이역들은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 됐다 점차 하나 둘 폐역으로 버려졌다. 그래도 낭만을 찬양하고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간간히 경전선을 이용했다. 나도 그 경전선을 언젠가 타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화와 벚이 흐드러지는 봄이 오면 느린 기차 걸음에 몸을 맡기고 이세월 저세월 보내는 그런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중간에 하동에 내려 최참판댁도 가보고, 득량역에 내려 옛날 이발관을 구경하고 이제 막 올라오는 청보리를 밟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인지 광주나 밀양까지는 가볼 엄두가 안났다. 그래도 마음 속 한 구석에 늘 버킷리스트로 자리하고 있었고 자주 가던 경북 영주에도 비슷한 기차가 있다는 걸 알았다.
경전선은 아니지만 타보고 싶었다. 아침을 먹고 영주기차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탄 열차는 V 트레인. V트레인과 하루키 에세이 속 일본 구마모토의 SL열차는 성격이 같다. 지금은 더이상 운송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는 예전의 기차를 복원해 관광 상품으로 이용하는 그야말로 추억을 싣고 달리는 기차다.
하루키 에세이 속에 묘사된 내용으로 보면 SL열차는 그 목적에 충실하게 내부와 외부를 최대한 예전의 그 모습처럼 복원했다. 실제로 연기를 뿜으며 칙칙폭폭 달려간다고 한다.
연약한 잠금고리 하나가 달려있는 나무 문, 목재로 된 내부, 천장에는 덜컹거리는 선풍기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했다. 1920년대 모습 그대로. 열차 내부는 소박한 도시락과 녹차를 판다. 기차를 탄 관광객은 기차가 지나는 간이역에 내려 역을 끼고 있는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기도 하고,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느린 시선으로 감상한다. 노천탕에서 목욕도 잊지 않는다.
V 트레인도 비슷하다. 곳곳에 손때 묻은 흔적이 남아있는 기차를 복원하고 개조했다. 창문을 열 수도 있고 낡은 의자, 천장의 선풍기가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즐기기 보다는 현대식으로 탈바꿈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눈요기가 될만하게 관광상품화시킨 점은 SL열차와 다르다.
V 트레인은 예전 모습처럼 복원하기 보다는 그 위에 엄청나게 화려한 핫핑크와 얼룩말 무늬를 넣었다. 시선을 끄는 그 화려함은 SNS용 사진을 찍기에 참 좋다. 내부는 그래도 추억열차의 역할에 나름 충실한 편이다. 옛것 그대로를 복원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에 소원을 적는 트리를 갖다놓는다든지, 미러볼을 돌리고, 최신 음악을 틀기도 했지만.(2년도 더 전에 간 거라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랬던 거 같다.)
간이역에도 두서번 내렸다. 간이역 중에 가장 유명한 역은 분천역이다. 스위스의 체르마트와 자매결연을 맺고 산타마을을 표방한다. 산타, 루돌프 등의 조형물이 놓여있어 사진도 잘 나온다. 하지만 그게 다다.
분천역이 어떤 역인지, 분천역을 끼고 있는 마을엔 누가 살았고 어떤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을 입구의 오래된 간판들이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지만 마을을 둘러봐도 다음 기차를 곧이어 탈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돌아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산타마을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조용하던 마을이 북적였다.
그 다음으로 내리는 역이 승부역이다. 혼자서 역을 지키던 역무원이 쓴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저런 시를 썼을까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릴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감수성에 젖을 충분한 시간과 공간은 없었다. 멋없는 시비 하나만이 이곳이 외로움이 사무쳤던 곳이라는 걸 말해줄 뿐.
그리고 양원역. 아주 소박한 대합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대합실 조차 하나 없던 이곳은 산골 오지 중의 오지. 이곳은 주민들이 만든 최초의 민자역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이곳에 기차도 서지 않았다. 양원역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 기차 문 밖으로 짐을 던져놓고 승부역에 내려서 걸어와서 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런 일이 어느 정도 반복되자 주민들이 손수 대합실을 만들었고 간이 화장실도 지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정겹고 애잔하다.
V트레인을 타고 양원역에 내리면 주민들이 파는 돼지껍데기와 잔 막거리를 한 잔 마실 수 있다. 그 맛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오지 간이역에 내려 옛 정취를 느끼며 맛보는 막걸리와 돼지껍데기는 환상의 조합이다.
이렇게 경북 오지를 굽이굽이 돌아 강원도 태백 철암역에 도착하면 V 트레인 코스의 마지막이다. 철암역은 탄광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정선에서도 탄광 마을을 관광화 시켜놓은 곳에 갔었는데 매우 애잔하고 인상깊었다. 또한 세련되게 해놔서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을 줬다. 철암역 탄광촌도 정선과 비슷했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아주 잘 만들어놨다. 사실 이건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계속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나 옛것이라면 해충 박멸하듯이 모두 깨부수고 감추고 없애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매우 진일보한 모습이다. 옛 모습 그대로를 현대에도 잘 어울리도록 해놨다. 하지만 아직은 옛것보다는 새로운 것이 더 각광받는 시대이니 강원도 탄광 마을들이 인기 관광지로 거듭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철암역 주변의 역사촌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철암역을 돌아와서 이번엔 O트레인에 올랐다. V트레인과 느낌이 좀 달랐다. 아주 럭셔리한 현대식 기차였다. 여행을 떠날 때는 천천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올 때는 빨리 편하게 오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데 그에 아주 걸맞는 기차였다.
V트레인 타고 갔던 이번 기차 여행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낭만적이었다. 가이드만 없었지 스팟만 찍고 오는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랄까. 일본 SL 열차처럼(타보지는 않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를 조금 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다음에는 분천역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