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 종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종이를 보면 뭐라도 끄적끄적 적지 못해 안달이다. 주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뭐라고 적을 수 있고, 꽉 채울 자신도 있다. 내가 브런치에 글쓰기를 선호하는 이유도 새하얀 빈 종이를 닮아서이지 않을까?
빈 종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글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들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새하얀 캔버스는 그대로였다. 뭘 그려야 할까? 무슨 색으로 칠해야 할까? 어떤 붓을 사용해야 할까? 그려야 할 것을 정했음에도 어떤 붓을 사용해야 할지 몰라 벌벌 떨었다. 물감은 아주 쥐똥만큼 짰다. 새하얀 캔버스 위에 색이 칠해지는데 걸리는데 30분 이상 걸렸다. 뭔가를 그렸는데, 뭘 그린 건지 모르겠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로 이 그림을 태워버리고 싶었다. 내 손은 여전히 떨렸고, 캔버스에는 요상한 것이 그려졌다. 그마저도 멈칫거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선생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유화 물감이라서 이미 그린 것 위에 덮어서 칠하면 되니까. 실패한다는 두려움을 버려.
그 말을 듣고, 나는 물감 하나를 골라서 팔레트에 잔뜩 부었다. 그리고 가장 크고 납작한 붓으로 물감을 퍼서 캔버스 전체를 덮었다. 처음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가장 평온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떠올리며 손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색을 고르는 것, 물감을 짜는 것, 붓을 고르는 것, 캔버스 위에 칠하는 것에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그림을 망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실패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다. 지금 이 브런치에 글을 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Backspace키로 지우는 것처럼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덮어서 그리면 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고작 그림인데! 망치면 또 어떤가? 고작 그림인데!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던 것일까?
망설임이 사라지자 아주 만족스러운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의 첫 그림. 나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바다와 정글 색 배경에 파드마 아사나(연꽃 자세)를 그렸다. 그간의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고 정말 평온했다. 요가 수련을 하는 것처럼 아주 마음이 편했다. 잡생각을 떨쳐내고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고민을 해결하는 것처럼, 그림도 그러했다. 종종 글이 아닌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 같다. 빈 종이 위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글이나 그림이나 똑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린 곳은 이태원 어느 골목에 위치한 드로잉 카페이다. 나처럼 새하얀 캔버스에 어려움이 있다면, 밑그림이 그려진 도안 위에 색을 칠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작업한 것처럼 캔버스에 그릴 수도 있고, 에코백에도 그릴 수 있다. 혼자 하는 체험에서 조금 욕심이 있다면 작가 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 정규 클래스도 있다고 한다.
<그림집 드로잉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