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것들. 베토벤 "운명"
종교가 있는 사람은 종교의 힘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특별한 종교가 없던 나는 인생이란 무엇일까에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해 한창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 윤리시간에 실존주의를 접하고 머리가 띵했다. 윤리책에서 사르트르의 이 말이 그 뒤의 내 인생을 바꿨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사람은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내가 한 주체적인 선택, 즉 자유의지로 내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 철학이 수동적으로만 살았던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후 20대까지만해도 내 인생은 주체적으로 뭐든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내 운명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부터 내 사주에 관운이 있다고 중고등학생 때는 부모님이 교대에 가라는 은근한 압박이 있었다. 입시 지원 시즌에 실존주의에 빠져있던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평생 아이를 가르치며 살기 싫어서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부모님 몰래 교대에 지원하지 않고, 그무렵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을 우연히 보고 감명받은 나는 경영학과에 접수했다. 수능이 끝난 후 교대에 넣지 않은 사실을 안 엄마와 엄청 싸웠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지원은 끝났는걸. 이후 경영학과에 입학해서도 부모님은 내 관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셨는지 행정고시 준비를 해보라고 하셨다. 공직은 큰뜻있는 사람만 가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뜻이 없던 나는 대학교를 다니며 마케팅에 빠져있어 공모전 준비하기에 바빴다. 취업을 하고 혼자 밥벌이를 하자 부모님은 그제서야 나의 관운에 대해 포기하신것 같았다.
하지만 살다보니 항상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만 있지는 않았다. 내가 죽도록 노력하던것을 이루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간절히 원하던걸 쉽게 얻어내는걸 보면서 사람의 운명은 어느정도 정해져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인생이 다른걸 보면 사주팔자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0년전쯤 엄마가 아는 지인을 따라 간 점집에서 평생에 딱 한번 점을 봤다. 그때 점을 봐주시던 분이 아무정보 없이 엄마 얼굴만 보더니 우리 가족의 과거를 정확하게 맞췄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은 공부를 여러번한다 그랬고 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둬야한다며 앞으로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흘려들었는데 정말 내 동생은 삼수를 하고 편입을 해서 대학을 2번이나 바꿨고 나는 클라이언트와 여러 유관부서를 상대하는 일을 하고있다. 믿기 나름이라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사람의 운명이란 정해진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연차 결재를 받아 놓고 너무 바빠서 연차도 못쓰며 미루고 일하고 클라이언트에 시달리며 일을 하는 지금 엄마가 점을 보러 간대서 해준 말이 계속 생각이 난다. 혼자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며 조용히 일하고 싶은데 하루에도 몇통화씩 클라이언트 또는 여러 유관부서 및 협력업체와 통화하고 바쁜업무에 시달릴때 이게 내 운명인가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정해진 운명안에서 조금씩 바꾸면서 살아가는게 인생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운명이란 내가 주어진 환경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사건들과 사람과의 인연이 얽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운명을 믿지 않았던 나는 내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제 조금씩 운명을 믿게 됐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꼬여버린 과거의 사건들과 불확실해지는 미래를 견디기 위해 운명을 믿어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NWWbA5H5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