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를 위한 최선에 대하여,

by 엄마코끼리
SE-0945b536-9cbd-4ae4-9c4e-5caa6619264b.png?type=w1

오늘은 비가 오고 날씨가 쌀쌀했다. 아이가 수영에 가는 날이라 수영가방을 챙겨서 학교로 갔다. 원래라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셔틀을 타겠지만 오늘은 둘이서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아이는 아이대로 책을 읽고 나는 나대로 책을 읽었다. 오늘 읽은 책은 <진짜 공부 가짜 공부>였다. 초반부 중반부는 술술 잘 읽히고 재미도 있었다. 2부는 아이들이 읽기를 바라고 쓴 부분이었고, 3부는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아이가 좀 자라거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그렇게 가볍게 읽었다. 이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SE-3019542c-72e7-4c90-8907-02d173679e91.jpg?type=w1

1등급을 목표로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시대가 어떻게 변해갈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학이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가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의 상당 부분에 공감하고 동의하면서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인서울 명문대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전체의 7%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교육으로 명문대에 보내고 싶다면 사교육비로 상위 7%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보내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사교육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저 동의하며 사교육에 그렇게 돈을 쏟을 자신이 없으니 필요한 순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 보자는 각오만 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오늘의 저 문장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SE-2d4cc181-58e5-4db1-8136-c4e711b1ea3b.jpg?type=w1

분명 저자의 의도는 그게 아닐 텐데 집에서 말 그대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학습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 문장은 다르게 말을 걸었다.


굳이 이렇게 애랑 싸우면서 공부 시키는 게 의미가 있어?


엄마표 학습을 하면서 고민하고 흔들리는 순간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그건 확신에 대한 문제였지 회의감에 대한 건 아니었다. 상위 4%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한 말이 아닌데, 오히려 사교육에 목메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96%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모두 실패자에 불행한 인생은 아니라고 자기의 꿈을 발견하고 다양한 경험에 노출시켜주고, 자아 존중감이 높은 아이로 키우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한 말이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문장들이 아프게 들렸다.


요 근래 매일 저녁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자꾸만 예민해지고 날선 반응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어서 그런 것 같다. 굳이 굳이 새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도 자꾸 화가 난다. 쉽게 화가 치밀고 거친 말을 내뱉을 것 같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밤마다 다짐하고 아침에 새로운 기분으로 화를 내지 않고 학교를 보내고 유치원을 보낸다. 그럼 나름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제법 괜찮다. 하지만 다시 저녁이 되면 나는 또 나쁜 엄마가 된다. 소중한 내 아이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학은 포기하고 수포자로 살았어도, '나는 수포자였어'라고 말하는 건 웃고 넘기지만 아이를 키우는 게 어렵고 지친다고 '나는 양육 포기자였어'라고 말하는 건 문제가 된다. 양육을 하면서 아이에게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오히려 이런 날이면 나의 자존감이 깎여나간다. 그리고 인내심은 진작에 닳아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내 자존감과 내 인내심에 집중해야겠다. 당분간은 내 마음을 돌보는 걸 우선해야지.


SE-2d43b2c0-e034-4ee1-938a-6035b7f50d90.jpg?type=w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이와 함께하는 미라클 모닝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