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이는 순한 편이었다. 졸리다고 보채는 일도 없었고, 배고파도 요란하게 울지 않았다. 자다 깨서도 울음부터 터뜨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잠을 잘 자는 편도, 잘 먹는 편도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키웠다.
그때는 울지 않던 아이가, 이제야 울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짜증이 일상이 되었다. 부르기만 해도 목소리엔 날이 섰다.
울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변한 게 아니라, 사춘기를 맞으며 감정을 처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시기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껏 잠잠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내려놓는다. 가장 만만해서가 아니라 무너져도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에게. 내게도 그 대상은 보통 가족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의 감정이 나에게 쏟아질 때마다 나는 상처받았다. 마치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았다.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너무 서러웠다.
그러다 오늘 아침, 책에서 한 문장을 읽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책은 두 번째 읽는 책이었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이 문장 앞에 서게 되었다.
아이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모르겠다며 시선을 떨굴 뿐이었다.
그때는 답답했는데 오늘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아직 다 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그동안 아이의 말을 ‘듣기‘보다는 고치려고 했고, 가르치려고 했다. 조금만 틀어져도 잘못 자랄까 봐, 어긋날까 봐 미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성장의 한가운데에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감정의 굴곡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감정을 아이가 꺼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는 말한다.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진짜 듣기라고.
“그래서 힘들었구나.”
“많이 지쳤나 보다.”
‘적당히 하라’는 말 대신,
아이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나의 감정에 붙여줄 이름이
사랑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