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놀게 하라> 책을 읽고,
아이들의 할 일은 '노는 것'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놀이를 통해 아이는 배우고 자란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도 모르게 '너도 이제 학습을 할 때가 되었다'하는 마음이 들었다. 수업은 따라가야 하니까, 선행은 안 하더라도 해야 할 것들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매일 해야 할 학습을 정해두고 그것을 두고 '너의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은 양에도 불구하고 그걸 봐주는 내가 너무 바빠서 공부하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이 바로 <아이들을 놀게 하라>였다.
이 책은 핀란드의 환경을 위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말하고 있다. 평균시험의 족쇄에 묶여 아이들의 쉬는 시간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기록된 책이라 그렇다. 물론 우리나라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수능으로 인해 등교시간이 미뤄진 상황에서 하교 시간이 동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만 봐도 우리나라의 학교에서의 우선순위도 결국은 아이들의 학업적 성취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리 선행학습에 치우치지 말자고 다짐해도 모자라게 준비하면 안 될 텐데 하는 걱정은 오롯이 남아있는 내 모습도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좀 더 도전적이었고, 필요한 책이었다.
근데 이 책의 매우 도전적인 부분은 아이들을 좀 더 자유롭게 놀이하게 두라는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설득력을 가지게 해주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직장 상사가 점심시간을 줄이고 남는 시간을 정해진 대로 쓰라고 강요한다면 어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출처: <아이들을 놀게 하라>
세상에, 이렇게 와닿는 비유라니! 물론, 어른과 아이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아이는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학교는 입학하면서부터 아이들이 혼자 등교를 한다고 한다. 그럴 수 있는 건, 학교 근처에서는 그만큼 차가 안전하게 멈춰주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지도 없이 정말 스스로 자유로운 놀이는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 스스로 자율성을 가지고 놀이를 할 때 아이가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아이를 엄마의 감시나 감독 없이(물론 멀리서 지켜보는 역할만 한다고 하더라도) 놀이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아이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이다. 예전에 비해 범죄율이 오히려 낮아졌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지, 내 아이가 해코지 당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 없이 누가 아이와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최소한의 간섭으로 아이의 놀이 시간을 지켜봐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설득했고, 아이가 노래를 부르던 심부름을 드디어 시켜볼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해주었다. (물론 아이가 다녀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시켰다.) 그 별것 아닌 일에 아이는 굉장한 성취감을 느꼈고, 그다음 심부름을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다.
놀이를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에는 그 안전의 느낌도 아이에게 달려있다는 걸 보는 순간 뭔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여기는 공간과 사람들이어도 아이에게 낯설고 불편할 수 있고, 내가 보기에 뭔가 불편하고 신경이 쓰여도 아이에게는 안전한 공간일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인과의 만남에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모였을 때, 아이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겠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내가 놀이라고 생각하는 게 놀이가 아니라 아이가 놀이라고 느껴야 놀이라는 것 나는 이 한 가지를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내 아이가 맞이할 미래가 지금과 분명히 매우 다를 거라는 걸 막연히 밖에 알 수 없는 지금, 정말 중요한 건 위의 글처럼 단지 교과서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데 매우 동의한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건,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과 시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된다. 그걸 위해서는 그저 지금 교과서를 따라가게 하는 학습에만 매달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는 더욱 주도적으로 스스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더 많은 교육이 아니라 더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 얼마나 와닿았는지 모른다. 어떤 학습을 더 시켜야 할지, 뭘 더 가르쳐야 할지 고민할 게 아니라 어떤 게 더 좋은 것일지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엄마도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끝으로 그전에 읽었던 <도둑맞은 집중력>과 <인스타 브레인>에서도 연결되는 글을 첨부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모든 새로운 기술에서 아이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노출하고 아이가 접해보는 게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 애가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하고, 그리고 스마트폰에 아이가 제대로 발달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빼앗겨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매우 동의했고, 그리고 한편으로 마음이 씁쓸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여유가 없을수록 아이의 스크린타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아이들을 놀게 하라>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텔레비전을 끄고 자녀와 함께 놀이터로 가라.
- 출처: <아이들을 놀게 하라>
아이가 방학을 했다. 방학 동안의 학습계획을 짰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가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걸 다짐해 본다. 물론 책에서 말하듯이 핀란드의 교육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건 각 나라의 문화와 환경의 차이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지만 웬만해서는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에 토 달지 않기로 했다. 오늘도, 내일도 짧은 시간이라도 놀이터에서 놀아보자고 매일 말을 건네는 엄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