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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늘도 모험을 떠난다.

by 엄마코끼리

아이가 둘이라는 건, 엄마의 육아 능력치가 레벨업이 되어 좀 더 수월하게 아이를 키우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둘째는 사랑'이라던가, '둘째는 발로 키운다'라던가 하는 표현만 봐도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맞닥뜨린 아이 둘의 육아는 전혀 달랐다. 우리 집 1호는 딸이고, 2호는 아들이다.


성별만큼이나 기질도 다른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엄마의 육아레벨이 1호를 대할 때와 2호를 대할 때도 다르다는 뜻이었다. 1호를 대할 때, 그동안 키우며 적응한 레벨업의 스킬들이 2호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냥 애초에 다른 아이였다.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했다. 다만 1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동거리며 육아하기 바빴고, 2호는 키우는 재미를 발견하며 육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요즘 내가 찾은 재미는 2호가 시도 때도 없이 떠나는 모험이다. 모험이라고 해봤자 엄청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 모험을 따라나서면 홀로 신나고 뿌듯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다.

유치원 하원시간이 되면 아이의 모험은 시작된다. 유치원에서 정성껏 그린 지도를 들고 함께 모험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지도에는 아이가 만나고 싶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그럼 우리는 그 지도를 따라가며 아이가 만나기로 한 것들을 찾는 것이다. 그 지도는 아이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아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책에서 자주 보는 아이 주도 놀이에 이보다 더 잘 맞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모험을 떠나자고 하면 웬만하면 따라나서고 있다.


아이의 지도는 날마다 모양이 다르고, 그 안에 그려져 있는 것들이 다르다. 하지만 모험의 장소는 그냥 우리 아파트 단지 안이다. 가끔 단지 밖을 나가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되도록 차가 다니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안전에만 신경을 쓰면서 손을 잡고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걷는다. 그러다 보면 빙글빙글 엉뚱한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아이에게는 낯선 골목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다른 아파트 단지를 헤매는 날도 있다. 그래서 이십 년을 넘게 산 동네에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아파트 단지를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고, 독감이 유행하면서 한동안 모험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추워서 안 된다는 말에 아이는 알았다고 납득을 했지만 사실은 많이 아쉬웠던 것 같다. 아빠랑 누나가 산책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에 띄게 아쉬워해서 핫팩을 챙겨 들고나가기로 했다. 아이는 주섬주섬 그동안 그렸던 지도를 챙긴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우리는 오랜만에 모험을 떠났다.

그저 단지 안의 나무 한 그루가 전설의 나무가 되고, 놀이터의 흔들말이 지도 속의 돌고래가 되고, 지나가다 만나는 구조물이 포켓몬이 되는 아이의 모험은 몇 번을 떠나도 귀엽고 즐겁다. 여전히 나는 알아볼 수 없는 내 아이의 지도를 보며 육아를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늘 나름의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뭐든 규칙적으로 이루어질 때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루틴이 되어야 뭔가 체계적으로 진행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학습도 루틴을 만들어 주고 싶었고, 아이의 저녁 일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날이면 유난히 지치고 화가 났다. 생각해 보면, 그건 아이가 알아볼 수 없는 내가 그린 지도를 들이대며 아이에게 길을 찾으라고 하는 건 아니었을까.


내가 더 어른이라는 건, 아이와 나 사이에서 배려하고 맞춰야 할 사람이 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이는 아직 배려를 배워가야 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대부분이 아이와 함께 돌아가다 보니 나는 자꾸 아이에게 어른스럽기를 바라게 된다. 늘 하던 일이니까 말하기 전에 했으면 좋겠고,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한 번에 알아들어주면 좋겠다. 내가 자세히 그려둔 지도를 보고 그대로만 걸어오면 되는데 왜 제대로 못 찾아오는 거냐고 아이에게 서운해하고 심지어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3살, 4살이 되면서 정말 너무 힘들었다. 아이를 키우는 게 벅차도록 힘들었다. 근데 그렇게 힘들었던 건, 첫째를 키우며 익힌 육아스킬이 둘째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아이가 그리는 지도를 살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이는 이제 7살이 되었다. 6살이 된 아이를 보며, 5살보다 훨씬 자랐구나 하는 감상에 마음이 뭉클했는데 올해도 아이는 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의젓해질 것이다. 내가 아이를 읽어주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는 나를 더 많이 읽어주고 있었다. 나보다 아이가 더 많이 자랐구나, 나는 오늘도 너의 뒤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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