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유진 Apr 23. 2021

그녀는 진짜 썅년이었을까 - 건축학개론

증축된 첫사랑일지라도 아련한 감성


4회차 정도 관람한 영화 <건축학개론>. 이용주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호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잔잔함도 있지만, 국민 첫사랑 '수지' 의 탄생이라면 얘기는 끝난게 아닐까. 추억팔이라거나 약혼녀를 두고 가져선 안되는 마음이 생겼다는게 말이 안 된다는 등 부정적인 의견도 많지만 어쨌든 나는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건축학개론> 이 좋다.



STORY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승민' 을 몇 십년만에 찾아온 '서연'. 서연은 제주도에 집을 새로 지어달라 의뢰하고 이를 들어주는 승민이지만 무언가 깔끔하진 않다. 사실 20살 시절, 두 사람은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고 소소한 추억을 만들어갔으며 서연은 그의 첫사랑이었기 떄문이다. 약혼녀 '은채' 가 있는 상황에서 공사를 위해 서연과 시간을 나누는 승민의 마음은 심란한데, 대체 둘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었길래 시원스럽지 못한 걸까.



가공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이야기

<건축학개론> 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꾸미지 않았다는 것. 아직은 화장이 서툰 여대생의 화장처럼, 술은 처음이라 억지로 꾸역꾸역 마셔대는 남학생의 시간처럼. 스토리 자체는 형태는 다르겠으나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첫사랑의 경험이다. 보통 로코나 멜로 장르라 하면 두 주인공의 관계를 밀고 댕겨서 그것이 해피 OR 새드 엔딩으로 끝나더라도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건축학개론> 에 리듬은 없다. 대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설정으로 두 인물이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과 후회, 답답함을 다루며 애간장 태우기 위한 억지스런 장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주는 배경 또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곳들이며, 인물 자체가 지극히 평면적이다.

그럼에도 좋은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의 첫사랑 시절을 '승민, 서연' 을 통해 간접 회상하며 우리가 살아왔던 아날로그 시절 속 타인의 연애담을 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즐겁기 떄문 아닐까. OST 는 워낙 좋으니 언급할 것도 없다. 극 중 BGM 도 그렇고, 마지막 <기억의 습작> 은 신의 한수 였으며 개봉 당시 이 노래를 즐겼던 세대들이 영화 속 두 사람의 나이와 비슷하기에 더 여운이 남을 것이다.


과거 <불신지옥> 에서도 이용주 감독은 자극적인 공포를 억지로 넣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그냥 내러벼두었다. 그 장점만큼은 <건축학개론> 에서 제대로 통했으며, 풋풋한 사회 초년생들의 연애는 더욱 즐거운 법이다. 여기에 배우 조정석의 '납뜩이' 가 아주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하여 숫기 없는 승민이 결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준다.



서연은 진짜 썅년이었을까

나의 결론은 승민이 멍청한 것이다. 연애 무경험자인 그를 부추긴건 '납뜩이'. 그렇다고 '납뜩이' 가 나쁜 놈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가 들은건 연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승민이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결정 내린 상황을 가지고 전달하기에 청취자인 '납뜩이' 는 승민의 의견에 동조하며 불을 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건 승민의 잘못이다. 같은 동네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멀리 여행까지 가지 않는다. 몰래한 첫 뽀뽀? 마찬가지다. 승민을 통해 납뜩이는 이사까지 도와주게 만드는 어장관리녀, 희대의 썅년이라고 결정 내렸지만 그가 전해들은건 오로지 라이벌 선배 '동구' 를 의식해서 사소한 것까지도 과하게 생각하기 떄문 아닌가.


승민은 '귀인오류' 를 범한 것이다. 상대방이 처해있는 상황, 외부요인은 무시한채 행동의 결과만 놓고서 과대하게 판단하는 오류. 동구가 집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겠지만 이후 서연이 내보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방에 불이 켜진걸 확인하자마자 승민의 마음은 완전히 꺾였다. 서연은 평소 선배에게 호감이 있다는 표현을 한듯했고, 자신보다 가진게 더 많기 떄문에 열등감에 빠진 승민은 모든 걸 서연이 썅년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스스로가 연애에 있어 주도적으로 결정내릴 능력이 하나도 없으면서 모든 걸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 서연이 대놓고 '널 이용한거다' 는 등 내처버렸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었지 않은가. 승민이 병신이다. 버려진 줄 알았던 물건과 함께 들은 고백 '니가 내 첫사랑이니까'. 그걸 듣고 키스하는 승민은 정상이 아닌 것이냐.


그럴수도 있다 본다. 제대로 확인해볼걸이라는 등 후회에 빠져 살아왔다면, 서연이라는 첫사랑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면 그럴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두 개의 감정을 갖고 있다면 진짜 나쁜 놈인거고.




서연은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보금자리를 증축한다. 서서히 자라는 키를 쟀던 벽돌. 아버지가 손수 만든 조그만 연못 등은 고이 간직한채 이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더해가는 것. 두사람의 관계는 이제 우정으로라도 유지가 될지, 아니면 끝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각자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현재가 다르다 하여도, 둘의 유대감에는 20살 시절의 두 청춘 남녀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짝퉁 게스 티셔츠에 열받아 망가뜨린 대문의 일부분은 녹슨 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집을 떠나면서도 승민의 마음에 깊게 남는 추억의 상처. 그래서 영화 <건축학개론> 은 기본 튤을 유지하되 새로움으로 빛나는 증축 현장처럼 아련함과 새로움의 감성이 어려있는 이야기다.

증축된 첫사랑일지라도 아련한 감성

매거진의 이전글 힘 없이 추락한 불신자들의 최후 - 불신지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