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동생과 나누지 않고도 죄책감 없이 홀로 한 그릇을 차지하고픈 마음
냉면이 먹고 싶다고, 며칠을 조른 것 같다. 아마도 TV에서 비빔냉면을 소개하는 프로를 보고
시작된 어리광이었던 것 같다. 먹고 싶다고 턱턱 사 먹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면만 있으면 크게 돈 쓸 일 없을 것 같았고, 솜씨 좋은 엄마에겐 그리 힘든 미션도 아닌듯했다. 보통은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것을 얻을 때까지 조르지 않는다. 우리 삼형제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엄마, 나중에 돈 들어오면~”으로 시작하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러나, 그날 냉면만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며칠을 졸라댔던 것 같다.
방에 딸린 주방은 너무 좁아서 요리를 할 수 없었다.
방안에 들어선 엄마가 검은 비닐 봉지에서 오이와 냉면을 풀어내는 것을 보고는 너무 신이 났다.
드디어 TV에서 보던 냉면을 나도 먹어볼 수 있구나~.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냉면을 풀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도 조리가 시작됐다.
은빛 오목한 냉면기에 얌전히 또아리 튼 흑색 면발. 보기만해도 매콤한 고추장 양념, 절인 오이와 무, 그리고 달걀 반숙, 파 송송, 깨 솔솔 올라온 비빔냉면 한 그릇. 동생과 나누지 않고 내 몫으로만 주어진 온전한 한 그릇이 머릿속에서 동동 떠다녔다. 조리하는 엄마 옆에 붙어있다가 신이 나서
놀러 나간 동생도 불러오고, 건너 방서 자고 있는 오빠에게도 “우리 저녁에 냉면 먹는다”라며
콧바람을 날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엄마의 조리는 막바지로 향하는데….
삶은 면 위에 그만 송송 썬 김치가 거침없이 부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무너진 나의 냉면. 아니, 처음 욕심낸 내 것이 무너지는 느낌. 온종일 기대했던 나의 밥상.
가난으로 잔뜩 움추렸던 어린 아이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게 해줄 고급진 한 그릇.
그 위에 김치고명이란 정말, 해물탕에 라면을 끓이는 기분이랄까. 국수보다 고급진,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 맛을 보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나는 울어버렸다. 한 여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는 갑자기 우는 나를 보고 당황하셨다. 울며불며 “이게 아니다~ 냉면이 아니다~ 엄마, 김치 왜 넣었어!” 라는 나를 보곤 엄만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안 먹을거야!” “이건 냉면 아니야!” 라는 내게 엄마는 진심으로 화를 내셨다. 엄마 나름대로 맛있게 먹이고 싶어서, 엄마가 아는 고추장 양념만으론 아쉬워서 지혜를 내서 김치를 첨가한 것인데,
알지도 못하는 딸내미의 진상에 그만 진이 빠진 것 같았다.
“그럼, 먹지마!” 그만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물론 무치다 만 냉면을 버릴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 내 덕에 우리 삼남매는 불어터진 비빔냉면을 한 보시기씩 저녁으로 먹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때까지 화가 나셨다. 아마도 서운했겠지. 아무리 아이라도 눈으로 보이는 정성을 몰라줬으니...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처럼 내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이는 것이다. 신선한 제철 재료로 아이들의 피와 살이 될 음식을 정성으로 입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러나 가끔 퇴근하자마다 바쁘게 차려낸 밥상을 보고 무작정 실망하거나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부아가 치민다. 어릴 땐 몸에 좋은 것이니 꼭 먹어야한다고 달래면 됐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입맛마저 까탈스럽기 이를데 없다. 신나게 육전을 부쳐놨더니 다이어트 때문에 먹지 않겠다는 딸아이나, 몸값도 귀하고 손도 많이 가는 생물 고등어조림을 보고는 왜 굽지 않았냐며 짜증내는 아들을 볼 때도 그렇다. 그럴 때마다 간혹 그날, 한 여름 내려앉던 석양이 단칸방을 비출 때 벌어졌던 김치냉면 소동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