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 사람한테 부하가 치밀던... 국민학교 1학년 오월의 어느 날
소풍. 단어만으로도 8살의 상상력을 충분히 부풀릴 수 있는 그것. 한글도 모르고, 덧셈 뺄셈도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소풍에 대한 설렘만은 배우지 않아도 아는 그것.
실내화 가방을 일흔 여덟 바퀴쯤 돌리며 한껏 들뜬 채로 하교한 소풍 전야.
기대와 달리, 엄마는 아무리 기다려도 분주해지지 않았다. 김밥 재료 준비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단칸방 어디에도 과자 봉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 오빠나 동생이 보면 안되니까, 엄마가 알아서 숨겨놨겠지.
자꾸 커지려는 불안감을 애써 기대로 덮으며 맞이한 아침. 역시나 엄마는 여느 때처럼 똑같은 밥상을 들였다. 첫 소풍길에 나서는 8살 계집애에겐
작고 빨간 도시락 가방을 하나 쥐어줬을 뿐이다.
양은 도시락에 담긴 계란말이.
각종 채소로 몸집을 부풀리지 않고, 오로지 노란 계란만으로 단단히 채운,
평소 같으면 탐낼만한 계란말이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첫 소풍 날,
그 도시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미안하다 한 마디 없이 초등학교 1학년 계집애의 손에
달랑 도시락 가방 하나를 쥐어주고 돌아섰다.
어제 집에 오면서 동네 친구와 만나 같이 가기로 했는데…. 2층 양옥집에 사는 친구는
김밥 도시락도 2층으로 쌌을텐데…. 그만 딱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든 한나절만 아무도 없는 곳에 숨고 싶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 친구 집으로 향한다. 열린 대문으로 현관부터 진동하던 참기름 냄새.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친구 엄마는 나를 보고, 물었다.
“00아, 너 그거 들고 온거야?”
나와 도시락을 번갈아보며 당황과 안쓰러움이 교차하던 그 시선을 잊을 수 없다.
아는 척을 말든가, 식탁 위에 남은 김밥 한줄 쓱쓱 썰어 넣어주던가.
이도저도 아닌, 곤혹스런 아줌마의 표정. 기죽고 싶지 않아서 돌아섰는데,
친구가 까만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섰다. 이미 빵빵한 가방도 모자랐는지
아침나절부터 동네 슈퍼를 다녀온 듯 했다.
운동장에서 줄을 서는데, 기를 쓰고 쫄리지 않은 척 했다.
걸어서 40분쯤 갔던 곳이 서삼릉이었던 것 같다.
가는 내내 앞만 보고 걷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소풍 장소에 도착해서 반별로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며, 장기자랑을 하는 내내
옆에 놓은 도시락 가방이 거슬렸다. 자꾸 다른 친구들의 배낭과 비교하는
내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작은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방에서 과자며, 과일, 음료수를 꺼내 선생님께
조공(?)을 했다. 할머니 담임선생님이었는데, 그다지 다정하거나 인자하지 않았는데도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
내 가방엔 사과 한 알, 음료수 한 개, 짱구 초콜릿 한 개.
나도 선생님께 사과 한 알을 내밀었다.
“너 그거 가져왔는데, 이걸 나를 주는거야?”
“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사과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내 자존심을 콕 짚어서 짓밟힌 듯 했다. 모르척 받아줄 법도 한데 그런 마음챙김까지 갖춘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고교 졸업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결국 받았는지, 되돌려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친구들이 없는 곳을 찾아서 홀로 도시락을 여는 순간, 눈치없는 내 짝꿍이 찾아오는 바람에 놀라서 뚜껑을 닫아버렸다.
결국 한 술도 뜨지 않고 음료수와 초콜릿 한 개만 먹고 고스란히 들고 돌아오던 그 길.
세상을 나홀로 지고가는 것 같은 공허한 공기, 꼭꼭 눌러 담은 밥의 무게는
고스란히 나의 자존심을 짓눌렀다.
소풍 따위에 호들갑 떨지 않은 척.
나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나의 부끄러움이 혹여나 걸음걸이로 표나지 않도록 신경쓰느라
돌아오는 그 길이 갈 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학교까지 돌아와 해산 지시를 받고 돌아서면서도 도망가는 걸음을 들키지 않으려
힘을 주느라 온몸이 뻣뻣해졌다. 동네 어귀로 들어서며 결국 터져버린 울음.
눈치없이 빨라지는 걸음에 양껏 울지도 못했다.
집이 가까울수록 눈물, 콧물 닦고 엄마 앞에선 나름 티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가 모를리 없지. 충혈된 눈과 상기된 얼굴. 한 술도 뜨지 않은 도시락.
왜 먹지 않았냐고, 당연히 배 고프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하루종일 긴장한 탓에 조금 더 성의있는 거짓말을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검색창서 찾아낸 빨간 도시락 가방
첫 소풍, 그 날의 묵직한 기억을 소환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