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덜 자란 나를 버리는 시간, 막걸리

그 시간만큼은 끈질긴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by 찐추아

시작은 효모와 누룩을 물에 담궈둔다. 밥 한 술 분량의 효모에 설탕 조금을 섞어 물에 불려놓는다.

요녀석을 배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다음은 누룩을 물에 담궈두기. 누룩은 밀가루나 콩을 뭉쳐서 만든 후 곰팡이를 배양해서 쓰는 것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니, 우리민족의 술 사랑이 지극한데는

이런 유례가 있었다. 그 다음은 작은 움직임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쌀이나 찹쌀을 씻는데 그 끝은 쌀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다. 그리고 채반에 담아 물을 뺀다. 족히 30분쯤 물을 빼고 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통에 쌀을 찐다. 40분을 찌고 10분 뜸들인 후 또 시작되는 기다림. 이번에는 고두밥이 식기를 기다리는데, 밥알이 살짝 차갑다는 느낌이 들 때 까지다. 겨울에도 족히 40분은 걸린다. 술을 빚고자 마음을 먹었다는 자체가 온종일 고요하고자 택한 것일 터,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 얼추 시간이 지나고 6시간 가량 배양해 둔 효모가 부글부글 일어났을 때쯤

고두밥에 효모와 누룩을 부어서 쌀알을 으깬다. 최대한 많이 으깨고 조물조물해야 술이 맛있어 진다는...

KakaoTalk_20250413_134910636_01.jpg 일러스트 김윤호

막걸리를 처음 만들게 된 건 두 해전 한 여름, 미친 듯이 김치를 담그다가 이어진 일이었다.

깍두기, 오이소박이, 열무김치, 깻잎김치를 비롯해 각종 절임류를 시간이 나는 주말마다 만들어댔다.

그때만해도 동네 중학생들에게 나름 논술 수업을 하던 때였는데, 규칙적으로 쉬는 토요일 딱 하루 세 시간을 내어 수업을 하던 때였다. 한 타임의 수업을 위해선 적어도 반나절은 공부를 해가야 수업이 공백없이

진행되던 때였다. 한마디로 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나는 김치를 어마무시하게 담구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평일엔 일하고 살림하고 술도 먹고(나는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편이다.) 주말엔 수업을

해가면서도 틈나는대로 김치에 무한애정을 쏟았다.

이유인즉은, 한시라도 몸이 편하면 찾아오는 우울감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공황발작 후 찾아온 우울증은 ‘극E’인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한달 쯤 김치를 담그다 보니

그 공정이라는 것이 너무 단조롭더라. 배우는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신경써야 했으니 집중할 수 있었지만,

일단 양념을 배우고 나니, 주재료만 달라질 뿐 대략 비슷했고 단조로웠다.

김장할 일 아니면, 김치 담그는 일로 하루를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기에 찾은 것이 바로 막걸리였다.

한 여름을 김치로 보내고 나자 선선한 바람이 부니,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모르고

누룩과 효모를 주문해 버렸다. 마침 11월에 접어드는 계절적 타이밍에 미루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급하고 오만한 성격상 남한테 배우는데 미숙한 나는 대충 눈으로 유튜브 두어 편 훑어본 후 되나가나

막걸리를 담그기 시작했다. 그렇게 담그니 처음 술은 내맛도 네맛도 없는 텁텁한 막걸리가 되었다.

그래도 좋다고 남편과 둘이 한 동아리를 실컷 부어라 마셔라 했다. 농도 조절 실패로 바디감 충만했던 그 술은 다음날까지 모든 시름을 잊게할 만큼 깊은 숙취를 안겼다. 한번 해보니 자신감이 붙었던터라

그해 겨울 두 번 더 술을 빚고 추위 속에 밀려오던 공허한 쓸쓸함을 넘겼다. 그렇게 세 번의 겨울이 지났다.

다행히 정신과 약도 끊은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우울증은 의사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극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 또 막걸리를 담궜다. 씻고 뒤집고 주무르는 고요한 기다림의 과정이 못내

그리워서다. 한 해 건너뛰고 나니 더더욱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유독 따뜻한 겨울.

기습한파가 몰아친 그날을 놓치지 않고 이내 술을 담궜다. 좋은 일을 기다리듯 설렘 속에 씻고, 찌고, 식혀서 섞어대는 그 과정을 만끽했다. 그리고 회사 송년회에 잘 익은 막걸리를 꺼내놓으며, 절친한 선배에게

이 사연을 털어놓고 나니, 나는 정말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 그래,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는거겠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나의 삶도 막걸리처럼 익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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