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35년 우정의 시작과 끝,
감자볶음‧멸치볶음

열 네살, 그날 나는 그 친구의 현란한 요리에 반해버렸다

by 찐추아


옛날 기와집 부엌에서 분주하게 석유 곤로를 꺼낸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는 냄비에 밥을 안친다. 돌아서선 아궁이에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는 큰 칼로 겁없이 슥슥 감자 채를 친다. 요즘에야 캠핑이나 리얼예능서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당시만 해도 솥뚜껑 비법은 보도듣도 못했다. 솥뚜껑 위에서는 순식간에 감자볶음이 완성된다. 다음은 멸치볶음. 뒤집어진 솥뚜껑 위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바쁘게 달달 볶아낸 멸치를 접시에 담는다. 곤로 위의 밥을 뒤적이더니, 친구들을 불러모아 밥을 먹이는 친구는 고작 열 네 살이었다.

평범한 밥반찬이지만, 그 당시 여중생 또래들이 친구 집에 놀러가면 십중팔구 라면 냄비 앞에 몰려 앉거나, 설익은 솜씨로 만든 떡볶이가 고작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밥상에선 엄마의 포스가 느껴졌다. 능숙한 살림 솜씨에 감탄하며 집은 감자볶음은 서걱서걱 덜 익었다. 멸치볶음도 짭쪼름하게 간이 잘 맞거나, 엄마표처럼 바삭바삭 하지도 않았지만, 모여 앉은 여중생 3명은 감탄에 감탄을 더하며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날 나는 그 친구에게 반해버렸다. 없는 살림에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내는 엄마를 보는 듯, 어른스러운 그 모습에 그만 홀딱 넘어가버렸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쌍팔년도 얘기냐고 하겠지만, 당시는 1990년도였다. 1기 신도시권이던 우리 지역은 개발이나 교육에서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한 반 65명 중에 20명이 농부의 딸이었다면 이해할랑가. 국민학교는 여기저기 있어도 지역권에서 여중고 하나, 남중고 하나여서 진학할 때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세 살 위의 회사 동료가 믿지 않을 만큼, 서울과 근접했지만 대단히 낙후된 바로 그런 지역이었다. 여중과 교문을 같이 쓰던 여고로 대부분 진학했으며, 9개 반 중에 7개는 상과였고, 두 반만 인문계였는데 취업률이야 그만저만 했으나, 진학률은 굳이 의미를 두지않는 환경이었다.

아무튼 열 네 살부터 친구하며 마치 연인처럼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두 번의 절교와 두 번의 재회를 통해 이어져온 인연은 쉰을 바라보는 시점까지 왔다. 30주년 땐 담양으로 기념여행도 다녀왔더랬다. 그동안 그 친구에게 받은 밥상이 몇 번이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도 해마다 여름휴가도 같이 가고, 봄이면 두 집 함께 나들이도 함께 하곤 했다. 홀딱 반한 처음과 달리 남에게 험한 말 못하고, 늘 상냥한 그 친구는 많은 나날 나에게 팩폭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히 내가 리드하고 친구가 따라와 주는 관계가 되었다.

KakaoTalk_20250511_134857681.jpg 일러스트 김윤호


그러나,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인생의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다보니, 어쩌면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의심하는 일이 잦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확신이 되었다.

그런 시선으로 나는 친구를 바라봤던 거 같다.

나랑은 정말 안 맞는 성향인데 그동안 내가 많이 봐줬다.

네 인생의 굴곡마다 곁에 남아준 사람은 나뿐이었다는 ‘셀프생색’을 내기 시작했고, 급기아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으로 꿍했다. 다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섭섭한게 꽤 있었다는 합리화를 하면서…

지난 겨울, 거친 통화를 주고받고 연락은 끊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지점이 마음 약한 그 친구가 손절을 선택하게 했는지 말이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완성형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솥뚜껑 위에서 현란하게 감자와 멸치를 볶아내던 그 모습. 나이먹어 얘기해주니, 오히려 그 친구는 기억도 못했지만, 내게는 문화충격에 버금가는 강력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을 잘 지키지 못한 책임.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성장형 인격체다. 주량처럼 인격도 쑥쑥 성장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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