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제모의 계절
1. 나이가 들었다. 2. 몸이 살찐 체형으로 바뀌었다.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옷 입는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었다. 총장 86cm 원피스에서 총장 118cm 원피스로 치마 길이가 무려 30cm가 길어졌고 여름이면 항상 민소매를 입었었는데 두꺼워진 팔뚝을 가리기 위해 여름에도 소매가 있는 옷을 고집한다. 옷이 바뀌니 편한 점도 있다. 바로 털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전에는 거의 매일 다리와 겨드랑이 털의 상태, 얼마나 자랐는지를 확인했지만 요즘은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다리는 치마 속에 숨겼고, 겨드랑이는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소매 안 쪽 안전한 곳에 있다.
벌써 오래전 영화가 되었지만 하정우 배우와 공효진 배우가 주연으로 나왔던 <러브픽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속하는 영화 속에 인싱적인장면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남녀의 사랑이 불타올라 서로의 몸을 탐하려는 순간 남자가 여자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씬이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해하는데 알래스카에서 살았던 여자는 그 지역의 풍습에 따라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모를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 때문인지 '겨털 에피소드'가 영화보다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체 언제부터 제모를 하게 된 걸까?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오래 전 고대 이집트에서도 남녀 모두 제모를 했고, 노예와 이방인은 제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모 여부를 통해 신분의 차이까지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명화 <모나리자> 속 여인 초상 중 눈썹이 없는 것도 넓은 이마가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당시 풍습에 따라 이마선에 난 머리털을 뽑고 눈썹을 밀어서 이마를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고 하니 흥미로울 따름이다. 제모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나 그 뿌리가 깊었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은 건 오랜만이었다. 화장실에서 직장 동료를 만났는데 그녀의 눈이 내 정강이 쪽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동료의 시선을 따라갔는데, 아뿔싸! 다리에 털이 삐죽삐죽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이미 내 다리에서 눈을 뗀 뒤였으나 나는 얼굴이 화락 화락 달아올랐다. '다리에 나있는 털을 보았을까? 어쩌자고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가 아닌 무릎 아래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나왔단 말인가! 아침에 샤워할 때 면도기 쪽으로 눈이 가더라니...' 오만가지 후회가 여름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준비 없이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듯 순식간에 마음이 동요했다. 이대로 퇴근하면 좋겠다.
속눈썹은 예쁘게 펌도 해주고 더 길어지라고 영양제를 발라주는 데다 풍성해 보이라고 가짜 속눈썹까지 붙여준다. 머리카락은 또 어떤가? 머리카락 빠지지 말라고 먹는 약도 있고 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뿌리부터 볼륨을 넣어주고 빈약한 모발은 가방로 대신하기도 한다. 같은 털의 일종일 텐데 유독 겨드랑이나 다리털은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다, 가만 놔두지를 못하고 기어이 뽑아내는 걸 보면. 퇴근하자마자 바로 욕실로 향했다. 다리와 겨드랑이에 난 털을 말끔히 밀어내고 나니 소나기구름이 걷히고 쨍한 해가 비친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깔끔해지긴 했으나 원래도 못생긴 다리가 갑자기 매끈하고 쭉뻗은 각선미를 뽐낼 리는 없었다. 문득 동료는 내 다리털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휴지나 내 신발에 묻은 얼룩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일이면 다시 다리가 드러나지 않는 원피스를 입을 테지만 다리털은 매일 확인하게 될 것만 같다. 양심에 털이 나는 게 문제이지 다리나 겨드랑이 쯤이야! 모든 사람들이 몸에 난 털을 밀지 않는다면 다리나 겨드랑이에 난 털들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아름답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자연스러워 보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열망은 몸에 난 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머리털 나고 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오래 생각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처음은 늘 처음이라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