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아이보다 어른에게 필요한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림책을 읽을 일이 없었다. 소설이나 에세이, 인문, 자기 계발서 등을 주로 읽었다. 어릴 때에는 읽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를 바꿔가며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모습과 그 곁에서 까르르 웃는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늘 바빴고, 지쳐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더 어렸는데 살림해가며, 장사해가며 연년생 남매를 키우는 일은 얼마나 대간했을까?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는 엄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한글을 일찍 깨쳤고 엄마가 읽어주지 않아도 내가 보고 싶은 책들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으니까. 다만 집에는 책이 없었으므로 유치원이나 놀러 간 친구 집에서 읽었다.
학교에 들어갔을 때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다 내 책 같아 좋았다.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갔고, 점심시간이나 청소시간 틈틈이 도서관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림책이 내 삶에서 희미해지다 못해 흔적조차 지워진 서른 중반에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옆에 두고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아이의 옆에 따라 누워서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든지 <사과가, 쿵!>을 읽어주었다.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아이가 자라면 나란히 소파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책을 읽는 상상을 하며, 사심을 잔뜩 안고 책을 읽어주었던 것 같다.
...늘 혼자 놀던 동동이가 구슬을 사러 문방구에 갔다가 알사탕 한 봉지를 사 왔는데 하나씩 먹을 때마다 소파, 반려견, 아빠, 돌아가신 할머니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아닌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파는 그동안 이 엉덩이 저 엉덩이 아래 깔려서 힘들었다고 말하고, 늙은 개는 철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힘들어서 같이 놀아주지 못한 거였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빠는 온통 철수 생각만 하는 아들 바보였으며 할머니는 천국에서 동무들과 즐겁게 생활하고 계셨다. 그들의 진짜 마음을 알고 나니 이제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국민 그림책 작가 백희나 님의 <알사탕> 내용이다. 아이와 함께 100번은 족히 읽었을 거다. 특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동동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수없이 사랑한다고 읊조리는 아빠를 동동이가 뒤에서 안아주는 장면을 아이는 가장 좋아한다.
-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사랑한다고.
아이 말이 백번 맞다.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해주는 알사탕은 세상에 없다. 그러니 소리 내어 말을 해야 안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알사탕이 있다면 이가 다 썩는다 해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치원에 가기 싫은 빨간 토끼가 있다.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유치원에 가지만 뭘 해도 영 재미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빨간 토끼가 만든 코끼리를 멋있다고 하고 편도 들어주셨다. 그러자 빨간 토끼가 달라졌다! 유치원에서 밥도 잘 먹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노래도 앞장서서 부르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다. 빨간 토끼는 이제 휴일에도 유치원에 가고 싶어졌다. 빨간 토끼는 집에 가기도 싫고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기고 며칠 뒤에 아이가 코로나로 일주일간 등원하지 못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할 때에 장기간 결석을 한 뒤 다시 등원을 하고부터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말을 매일 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한 달만 다녀보자고 하면서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를 안고 <당근 유치원>을 읽어주었다. 유치원에 가기 싫은 아이가 여기도 있다며 빨간 토끼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 같다고 했다.
- 사실은 엄마도 회사에 가기 싫어.
하고 아이 귀에 속삭였다.
- 엄마도?
하며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섬세한 아이의 성향과 결석으로 인한 적응 문제를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아이의 행동과 말에 세심히 반응을 보여주셨다. 선생님의 관심이 빨간 토끼를 변화시킨 것처럼 아이도 서서히 유치원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한 두 명씩 늘어났다.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아이는 매일 나무처럼 자랐다.
...아침마다 낱말들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내가 있다. 나는 돌멩이처럼 조용하다. 소리 없이 아침밥을 먹고 말없이 학교 갈 준비를 하며 학교에서는 맨 뒷자리에 앉는다.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처럼 말하지 않는 것에만 귀를 기울인다. 한 사람씩 가장 좋아하는 곳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에 내 차례가 되었지만 입이 아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학교에 나를 데리러 왔다가 강가로 갔다. 강가를 걷다가 아빠가 말한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히는 강물처럼 나는 그렇게 말한다...
아이는 믿고 기다려주는 만큼 성장한다. 어른의 기준이 아니라 아이의 속도에 맞춰주어야 넘어지지 않고 제 속도로 자랄 수 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내 키만큼 자랄 것이다. 몸이 커질수록 마음도 키워야 한다. 마음을 키우는 것은 바른 생각의 씨앗이다. 세상에는 말이 느린 사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신체가 불편한 사람, 피부가 하얀(검은)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힘든 사람.. 나와 다른 모습을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많다.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 각자의 생도 소중하다. 비웃으며 손가락질해 그들을 움츠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이유 없이 가여워해서도 안 된다. 동정은 금물이며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손을 내밀면 그뿐이다. 생각의 씨앗을 아이의 마음에 심어주고 잘 자라도록 살펴주는 것은 어른이 할 일이다. 좋은 생각의 씨앗, 따뜻한 생각의 씨앗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면 좋겠다.
모두가 어릴 적에 읽었던 그림책을 읽고 느꼈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산다면 세상 사는 일이 이렇게 고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책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간다. 풍파에 치여 지칠 때쯤 그림책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기도 하는데 바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잊고 지냈던 말랑말랑한 감성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잠들어있던 선한 본성이 깨어나기도 한다. 쉬운 말로 쓰였지만 유치하지 않고 그림책에서 말하는 대로 사는 일은 어른들에게 오히려 어렵기만 하다. 그림책을 곁에 가까이 두고 잠들기 전 아이와 같이 읽어야겠다. 잠든 아이의 곁에서도 읽어주어야겠다. 내가 나에게 읽어주어야겠다, 아직 어른다운 어른이 되지 못한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