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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ul 21. 2022

가지볶음과 어묵볶음을 만드는 일

여름잠에서 깨어나기 위한 알람

여름철 전기 사용량이 급속하게 많아지다 보면 전력에 과부하가 걸려 전기가 차단되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에 많은 일을 처리하다 보면 생체리듬과 생각 회로가 끊기게 마련이다, 바로 번아웃(burnout) 상태. 지난 며칠간 나는 아무렇게나 널어놓은 오징어처럼 생기 없이 축 쳐져있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이글거리는 한낮의 태양볕,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뜨거운 열기, 습기 가득 머금은 축축하고 무거운 바람까지 시간이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지는 무더위의 기세 앞에 몸은 지치고 무기력했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며 아이가 말했다.

- 엄마, 슬라임 같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몸이 힘들고 괴로워 무중력 상태에 내던져진 듯 내가 나를 주체하지 못했었다. 책도 못 읽고, 글도 못 쓰고 아이와 놀아주지도 못했다. 몸이 아프니 어쩌면 당연한 상태였겠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불편했는데 증상은 몸이 아플 때와 비슷했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생각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멍하게 있거나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목적 없이 티브이를 응시하는 게 내가 하는,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삶을 통제하며 살기는 어렵고 미래를 예측하며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게 속하는 일들도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의 일이나 남편의 일은 오죽할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니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지켜만 보고 있자니 속이 편안할 리 없다. 결국 감정이 얹혔다. 먹은 게 체했을 때 속을 비운 상태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감정이 체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시간이 약이다.

신일숙 작가님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이미지출처, 교보문고>

시간이 주는 약은 열흘 정도가 지나자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하게 붙잡고 있던 책 한 권을 마저 읽었고, 퇴근길 마트에 들러 가지와 어묵과 대파와 양파를 사 왔다. 재료라고 하기에도 단출했지만 재료들을 물로 씻고 도마 위에 올려 찹찹찹찹 썰다 보니 리듬감이 생겨서 그런지 몸이 조금 경쾌해지는 것도 같았다.


가지와 어묵을 함께 사 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들기름, 간장, 갈아둔 고추양념(고추, 마늘 등등을 넣어 갈아둔 양념), 고향의 맛이 난다는 조미료까지 들어가는 양념이 똑같기 때문이다. 가지를 볶은 웍을 닦을 필요 없이 바로 어묵을 볶으면 되는 터라 설거지 거리도 하나가 준다. 양념은 같은데 기본이 되는 재료가 다르니 가지볶음과 어묵볶음의 맛은 비슷한 듯 하지만 같지 않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집 안 가구 배치를 하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들이다. 가지와 어묵을 볶다가 싱거우면 간장을 조금 더 넣고, 짜면 물을 조금 더 넣으면 그만이므로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예상과 조금 다른 맛이라고 해서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 지지도 않는다.


청소는 또 어떤가! 이리저리 어질러진 물건들을 제 자리 찾아주고, 바닥에 먼지들을 청소기로 빨아들인 후 걸레질까지 해주면 복잡했던 마음까지 단정 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친 김에 한쪽 벽에 있던 소파를 창가로 옮기거나 침대 시트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새 집으로 이사하는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집안일은 거창하거나 티가 나는 일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임으로써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우울감을 밀어내고 활기를 되찾는데 적격이다.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으로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다. 혹독한 추위에 맞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 힘든 일이 일상을 뒤흔들 , 휘청거리며 좌절하는 대신 잠시 잠을 청하는 것도 좋을  같다. 나는  열흘 간의 여름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던 참이고, 나를 깨운  가지볶음과 어묵볶음을 만들기 위한 사소한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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