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대한 상념
하루 종일 울렁거리고 메스껍던 입덧이 사라졌다. 예고 없이 찾아와 괴롭히더니 올 때 그랬던 것처럼 갈 때도 소리소문없이 가버렸다. 그래도 전혀 야속하다거나 서운하지 않다. 지금이라도 떠나준 것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몸이 힘들 때에는 집안일은 물론 좋아하는 책 읽기도, 글쓰기도 세상 귀찮더니 구석구석 쌓인 먼지가, 책장에 꽂힌 책들이, 그리고 덩그러니 내던져진 무선 키보드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몸이 좀 편해졌나 보다.
그간 가장 눈에 거슬렸지만 못 본체 하던 것 중에 하나가 옷 방이었다. 계절을 잃은 여름옷들, 찬바람 불기 시작하며 꺼내 입기 시작한 옷에 철 지나 버려야 할 옷들까지 어지럽게 한데 엉켜있었다. 엉덩이를 소파에 붙이는 순간 그날 일과는 그걸로 끝인 걸 알기에, 하루 날을 잡아 퇴근하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옷 방으로 들어갔다. 소임을 다한 여름옷들은 개서 수납함에 따로 넣고, 애타게 주인의 손길을 기다렸으나 끝끝내 주인에게 닿지 못한 색 바랜 옷들은 현관 옆으로 쌓았다.(그렇다, 버리는 건 남편의 몫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결 여유 있어진 공간에 지금 입을 옷들을 걸어두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그다음 날은 널브러져 있던 기름땐 낀 프라이팬들을 소탕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쿵. 쿵. 쿵. 거실에서 주방까지 가는 서너 걸음이 사뭇 비장해서 혼자서 피식 웃었다. 요리에 취미가 없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빈약한 주방이기에 프라이팬도 몇 개 없거니와 더 사용하기 위해 따로 빼 둘 것도 없이 싹 다 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홈쇼핑으로 미리 주문해 두었던 스텐 프라이팬 세트를 꺼내니 새것답게 반짝, 윤이 났다. 가열 후, 식용유를 두르고나서 키친 타올로 연마제를 닦아낼 겸 여러 차례 기름을 먹였다. 스텐은 관리만 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니 오랫동안 같이 지내보자꾸나. 내 비록 프라이팬으로 할 줄 아는 요리가 계란후라이일 뿐이지만 기름은 꼭 꼬순 들기름으로 둘러줄 테니. 그런데 스텐 프라이팬, 너 좀 무겁다?
또 다음날,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커다란 두 개의 택배박스가 현관 앞에 놓여있었다. 가벼우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문을 열지 못할 뻔했다. 상자 안에는 꿀잠을 자게 해 준다는 브랜드의 어른용 베개 4개와 아이용 베개 2개, 총 6개의 베개와 각각의 베개에 씌워 줄 베개 커버가 들어있었다. 매일 샤워하고 땀을 많이 흘린 날엔 두세 번도 샤워하는 남편의 베개는 왜 이렇게 자주 더러워지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커버 세탁을 하고 베개를 베란다에 널어 햇빛 샤워를 하게 해도 역부족이었다. 큰맘 먹고 거금을 들인 이유이다. 쓰던 베개는 목이 아파서 잠을 못 자던 남편을 위해 구입했었으니 2년 조금 더 사용했다. 베개나 침구의 사용 기간이 1-2년이라고 하니 바꿀 때도 되었다. 그동안 목을 편안하게 받쳐주어 고마웠어. 잘 가. 아, 이불도 바꿔야 되는데...... 굴뚝같이 피어오르는 구매 욕구들 급하게 누그러뜨렸다. 다음 달에 한번 상황을 보자꾸나. 연가보상비가 나오려나?
무려 삼일에 걸쳐 하나씩 비우고, 버리고 새것으로 대체했다. 그래도 비울 게 아직도 많이 남았다. 살면서 중간중간 새로 사들인 살림살이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결혼하고 한 번도 바꾸지 않은 것들이 있다. 신혼에 장만한 그릇세트가 그러하고, 장롱 속 이불이 그러하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밥그릇에 이가 나간 것도 있고, 하나가 깨지는 바람에 짝꿍을 잃은 머그컵도 있다. 파스텔톤 냄비들은 때깔을 잃었고, 퐁신퐁신했던 거위털 이불은 장롱 맨 밑바닥에 깔려 찌부러져있어 벌써 몇 해 동안 꺼내보지도 않았다. 모두가 처음에는 윤기가 흐르고 고운 색감에 소중히 다뤄졌던 물건들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잃고, 색이 바래고, 함부로 다루어진다. 낡은 것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자비란 없다. 버리는데 미련이 없고 더 좋은 것을 사는데 거리낌이 없다.
오래되고 낡았다고 해서 모두 하찮은 것은 아니다. 30년 넘게 함께한 친구들, 30년 산 위스키, 빈티지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으며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나라의 고궁들과 역사를 품은 유럽의 거리(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들이 그러하고 문화재나 유명 작가의 그림들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치가 올라가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마흔 한 해를 살고 있는 나 역시 낡아지고 있고 종국에는 늙어버리겠지만 나이듦과 상관없이 멋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에게 세월이란 피할 수 없는 소나기 같다. 우산이 준비된 사람은 빗물에 겉옷이 조금 젖을지언정 속옷까지 흠뻑 젖지는 않는다. 인생길에서 만날 소나기에 언제든 꺼내 펼칠 수 있는 우산이 내 두 손에도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 겉모습이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속마음까지 속절없이 늙고 싶지 않으니.
- 당신의 우산은 무엇인가요?
- 저는 책과 글로 우산을 삼아볼까 해요.
* 커버사진 출처: 30년지기 친구네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