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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하나, 크롭티 입기에 적당한 나이

크롭티 프로젝트

by 달콤달달

최근 두 달 사이에 냄비를 세 번이나 태워먹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국이나 찌개를 데워놓을 요량으로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는 까맣게 잊고 코를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를 맡고 나서야 '엄마아~!!!' 하며 다급히 불을 끈 것이다. 세 번 다 집에 머무는 동안이었기에 망정이지 가스를 켜 둔 채로 외출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탓으로 돌리는 건 정말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탓이 바로 '나이 탓'이 아닌가 싶다.


기억력 하나만큼은 자부하던 나였다. 어릴 때부터 어제 본 드라마도 줄거리로 대충 말하는 게 아니라 남녀 주인공의 대사를 읊어가며 생동감 있는 스토리를 전달해주고, 영어 시험을 앞두고는 본문을 통째로 외웠다. 좋아하는 시 서너 편은 어느 자리에서나 읊을 수 있고, 누가 '그거 있잖아...' 하고 입술만 달싹일 때 '아, 그거?' 하고 상대의 가려운 부분까지도 척척 긁어주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와 함께하는 '같은 그림 찾기 게임'에서도 이기는 날이 거의 없다. 마흔을 지나며 총기가 빛을 잃었다.


반짝이지 않는 게 기억력뿐 만은 아니다. 피부는 탄력 없이 쳐지고, 머리도 희어지기 시작했으며 야금야금 찌기 시작한 몸무게는 그 높은 곳이 원래 제 자리였던 양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솔직히 한 번도 마른 몸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늘씬과 거리가 먼, 통통과 뚱뚱의 경계에서 머물렀다. 그래도 통통 쪽에 가까워 보세 옷은 M사이즈, 브랜드 옷은 66을 구입하면 길이나 사이즈가 늘 맞춘 듯 잘 맞았다. L(라지)이나, 77 사이즈는 여자에서 아줌마로, 제3의 성별을 갖게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가, 필라테스, PT, 걷기...어떻게 해서든 여자의 바운더리를 넘어가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건강의 이유보다는 외적으로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몸을 움직였다.


옛날 일을 들추는 사람 치고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자꾸 '라테'를 들먹이게 되나 보다, 지금 나처럼. 옛날에는 총기가 있었고, 옛날에는 날씬은 아니어도 뚱뚱하지는 않았다는 게 뭐 그리 자부심이겠냐마는 그것마저 잃은 지금은 과거의 나 자신이 '그림의 떡'인 신세가 되었다. 삶의 비극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온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이 여름, 나의 비극은 크롭티는 입고 싶으면서 그 어떤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식단 조절을 하지 않고, 운동하러 집을 나서지 않는다.


솔직히 조금 억울한 면도 있다. 먹어서 살이 찌는 거라면 나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데도 살이 찐다. 남편이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다. 먹는 걸로는 여섯 살 아들이 나보다 더 많이 먹는다. 그래도 짐작되는 요인이 두 개 정도는 있다. 첫 번째는, 면이다. 라면, 칼국수, 멸치국수 등 면을 밥보다 사랑한다. 마흔이 넘어가며 바뀐 입맛 중에 하나가 떡볶이인데 그 전에는 떡볶이나 수제비처럼 뭉쳐져 있는 형태와 식감을 좋아하지 않았던 반면, 요즘은 토요일 아침식사 루틴인 라면에 이어 점심은 떡볶이가 주말 일상이 되어 버렸다. 최근 다이어트에 최악의 음식이 떡볶이, 그중에서도 로제 떡볶이라는 기사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는 많이 움직이지 않는 것. 살이 찌는 데는 그리고 빠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 없었다.


올해 여름엔 크롭티를 입고 싶다, 입어야 겠다. 살찐 몸을 떠받드느라 혹사당하고 있는 나의 무릎을 구원해주고, 혈관에 쌓여있을 콜레스테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음이다. 살 속에 파묻힌 쇄골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졌고 척추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라 가끔씩 내가 연체동물인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딱 붙어있는 허벅지들도 서로에게 이별을 고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누군가와(@폴폴) 함께 크롭티를 입고 별을 보러 가자고 약속을 했다. 다행히 아직 여름 초입이고 나에게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라는 게 있다. 의지를 글로 옮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크롭티를 입기 위해 몸무게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갑자기 45kg이 되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려는 건 아니다. 지방 없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라면 몸무게가 70이든 80이든 상관없다. 군더더기 없는 배가 포인트이다. 청바지 위로 '안녕!'하고 빼꼼히 존재감을 알리는 뱃살이 없애는 게 목표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좌) 배우 한지민, 우) 레드벨벳 조이. 냉장고에 붙여놓고 매일 봐야지.


'크롭티 프로젝트'라 이름 짓고 기간은 우선 한 달, 실천할 항목은 식이요법과 걷기로 정했다. 덜 먹고 더 움직이는 것이 기본 공식 아니겠는가! 처참한 몸 상태를 마주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인바디 측정도 필요할 것 같다. 다행히 헬스장 등록을 하지 않아도 회사 건강증진센터에서 가능할 것 같다. 계획은 대략 세워졌으니 다짐을 불태울 명언(?) 하나를 곁들여본다. 톱모델이자 방송인 한혜진 님이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이다.

세상에 어떤 것도 내 제 마음대로 안 돼요. 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몸 밖에 없더라고요.
<KBS 대화의 희열 한혜진 편. 의지와 몸에 대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멋지면 다 언니! >


혼자만의 결심은 금방 시들기 마련이라 주변에 공언하면 지속력을 높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에게 이야기 했더니 뭘 힘들게 살을 빼려 하느냐고, 자기는 살찐 나도 괜찮다고 했다. 고마운 말이긴 한데 내 몸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하는 게 맞다. 생각만 하고 실천력은 0(zero)이었던 모순 가득한 삶을 깨부술 사람 또한 결국 나 자신이고 행동으로 옮기기에 가장 적당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나 나의 기준은 크롭티가 어울리는 건강한 몸으로 정했다. 마흔 하나에 크롭티가 웬말인가 싶으면서도 입지 않는 것과 입지 못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크롭티를 입는 그날까지 일단 고(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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