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사용설명서가 필요한 이유
- 여보, 찜기 좀 사주라(사진 전송)
- 여보, 닭가슴살 이제 주문해야 돼.
- 여보, 소고기 좀 주문해도 될까?
- 여보, low sugar 케첩이랑 마늘 분말가루 필요해.
- 여보, 오트밀 주문했어.
요란하게, 남편이 다이어트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이 몇 번째이더라? 배우들이 맡은 배역을 위해 몸무게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평범한 성인 남성의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을 넘나들며 쪘다 빠졌다 반복이다. 남편이나 나나 먹어서 얻는 즐거움이 큰 편이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몸이 금방 불어난다.
남편이 몸이 아파서 회사를 그만둘 쯤 몸무게가 96킬로그램이었다.(키는 179. 5센티미터이다.) 직전 부서에서는 몸이 힘들어 76킬로까지 빠졌었다가 부서 이동 후 3-4개월 만에 20킬로가 불어났으니 몸에서 고장 신호를 보낸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퇴사 후, 한 달 여를 쉬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뱃살 때문에 앉아있는 게 힘들고 허리에 무리가 가니 스스로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3-4개월 동안 십 여 킬로그램을 감량해서 84킬로그램이 된 이후 꽤 오랫동안 유지어터로서 지냈다. 몸의 통증도 줄어든 듯 보였다. 이런 의지를 가졌다면 시험도 합격하지 않을까? 인간에 대한, 남편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하던 시기였다.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한 풀 꺾인 남편은 운동과 식단 조절에도 느슨해졌다. 쉴 때는 소파에 누웠고 피자, 족발, 치킨 등 한동안 먹지 않았던 음식들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배달앱으로 지출되는 돈과 우리 가족의 몸무게가 정비례로 증가했다. 살을 뺄 때에는 1킬로를 빼는 것도 어려운데 살이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남편의 얼굴이 보기 좋게 핀다 했더니 이내 얼굴과 목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배는 만삭 임신부보다 더 빵빵하게 부풀었다. 바람을 가득 담은 풍선처럼 바늘 끝으로 톡, 하고 찌르면 빵,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살이 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틈만 나면 누우려 하고, 피곤해 했다. 코 고는 소리가 한층 더 커져서 아이조차 아빠 옆에서 자기를 꺼려할 지경이었으며 무엇보다 다시 몸이 아프다며 매일 병원에 출근도장을 찍는 것이 문제였다. 작년 겨울에 다친 허리가 여름을 기점으로 더욱 통증이 심해져서 신경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그때뿐 차도가 없었다. MRI까지 찍었는데 디스크도 아니라고 하니 이제 남은 방법은 체중을 줄이고 허리 근육을 튼튼하게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남편의 몸무게는 어느새 95킬로그램에 달해있었다. 관성이란 얼마나 정확한 과학 법칙인가! 산란기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연어들처럼 남편의 몸은 95-96킬로를 기억하고 자꾸만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악순환의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계점에 다다른 그는 다시 외로운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다이어트할 때 가장 중요하고 번거로운 게 식단을 챙기는 것이다. 수납장 속에 잠들어있던 저울이 다시 등장했다는 건 그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한 끼 밥의 양을 150g으로 정하고 닭가슴살 스테이와 양배추찜을 특제 소스인 케사비(케첩+와사비)에 곁들여 먹었다.
남편은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다이어트 레시피를 십분 활용했다. 닭가슴살+오트밀+마늘가루를 조합해 제법 닭죽스러운 맛을 구현하고, 소고기 중에서 기름기가 적다는 설도 부위를 이용해서 소고기 덮밥을 만들어 먹었다. 예전에는 샐러드를 배달해서 먹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생략했다. 대신 고구마와 단호박을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먹거나 가끔씩 호밀빵 샌드위치로 단조로운 식단에 건강한 자극을 더해주었다. 간식으로는 삶은 계란의 흰자를 먹었다. 한 가지 칭찬해 주고 싶은 점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차려 먹는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노력이 꼭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고맙게도 몸은 꽤 정직하게 반응한다. 식단 조절에 더해 하루에 한 시간씩은 사라봉을 돌며 땀을 흘리니 서서히 배 둘레가 감소했고 예상대로 허리의 통증도 줄어들었다. 몸이 가벼워지자 남편도 덜 힘든지 짜증도 덜 내고 공부하는 데 집중도 더 잘 되는 눈치였다.(어디까지나 내 느낌이다) 목표했던 바에 가까워질수록 성취감이 높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이 빠지면서 사라졌던 목이 생기고, 쇄골이 드러나고, 옷맵시도 돌아왔다. 배달음식이 줄어들면서 생활비가 절약되고, 조금 더 건강한 식습관이 형성되었다. 두 달 정도 지속한 결과 현재 남편은 10킬로 감량을 해서 85-86킬로그램이다.
남편이 목표하는 수치는 78킬로그램인데 요즘은 정체기인 모양이다. 사실 78킬로그램이면 나랑 몸무게가 얼추 비슷해진다. 아무리 임신 중이라고 하더라도 남편과 같은 몸무게는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지금이 딱 보기 좋다고, 너무 말라도 본새가 안 나는 거라고 설득한 적도 있지만 32인치 바지를 입고야 말겠다는 남편의 집념은 확고하다 .임신과 함께 내 다이어트는 출산 후를 기약하기로 했으니 지금은 대리만족하며 남편을 응원만 해야겠다. 뭐든 내 맘대로 안 풀리는 세상에서 의지대로 되는 것이 몸뿐이라면 기꺼이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 몸의 기준을 타인에게 맞추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성취감, 만족감, 효능감을 맛 본 나의 자아는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하나를 이뤄낸 뒤 또 다른 하나를 이뤄낼 자신감은 1+1으로 따라온다고 믿는다. 내 몸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싸워도 지지 않는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유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