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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Apr 30. 2023

생선 가시 발라주는 남자

매일 다정하진 않지만 대체로 친밀한 그와 그녀

‘뭘 또 쓰레기통에 안 버리고 식탁 위에 그냥 놔뒀어!’ 식탁 위에서 잔뜩 구겨뜨린 쿠킹호일 뭉치를 발견한 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집에는 무엇이든 식탁에 내버려 두는 습관을 가진 남자 어른이 산다. 다 먹은 과자 봉지, 먹다 남은 혹은 다 먹은 음료수 페트병, 새로 뜯어 쓴 마스크 포장 비닐......쓰레기통이나 분리수거함에 있어야 할 이 사물들이 왜 매번 식탁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답을 아는 사람을 안다.

- 여보, 이런 건 바로바로 정리 좀 하자.

 - 당신도 식탁에 책 쌓아두잖아.

쓰레기와 책을 동일시하는 이 무심, 아니 무식한 남자와 오늘도 살 부비며 살고 있다.


오늘은 또 무얼 버리지 않고 식탁에 남겨둔 건지 호일 뭉치를 열어보았다. 앗, 이것은 뼈가 잘 발라진 포동포동한 생선 살이 아닌가? 뽀얀 자태를 요염하게 드러낸 이 생선의 정체는 며칠 전 시댁 제사에서 가져온 옥돔이 분명하다. 제사에는 평소 먹는 것보다 더 크고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장만한 음식을 상에 올린다. 옥돔도 마찬가지. 뭔지 확인도 안 하고 버렸으면 아까워서 배가 아플 뻔했다. 아니 그럼 ’여보 먹어.‘ 하고 쪽지라도 써 놓거나 잘 보이게 접시에 담아 랩이라도 씌워두지 은박지에 대충, 이게 뭐람. 참으로 나의 남편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세련되고 섬세한 사람들이 있다. 누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상대방의 동태를 살펴 미리 행동으로 옮기는 센스가 넘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애석하게도 내가 선택한 남자는 이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촌스럽고 뭉툭하다.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하고, 나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먼저 행동하지 않는다. 고구마 200개를 한꺼번에 먹은 듯 속이 답답해 가슴을 내리치는 날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우리 부부는 대체로 친밀하게 지내는 편이다. 비법은 ‘속마음을 따로 두지 않고 그대로 말하기’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부부 사이에서 말을 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오해와 갈등은 생각보다 많다.


분리수거할 게 많으니 ‘지금’ 버려줘. 화장실 청소하는 날이야 잊지 마. 현관 센서등 교체해야 해, ‘오늘 꼭’. 건조기에 수건 돌려놓았으니 꺼내서 개켜줘. 젖은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바로 넣지 말고 걸쳐놔. 밥 안쳐놨으니 다 되면 저어줘... 남편에게 수시로 말하거나 메시지로 보내는 단골 멘트들이다. 남편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 ‘지금’, ‘오늘’ ‘1시’처럼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분담하는 가사 대부분은 긴급을 요하지 않아 자칫 미뤄기 쉽다. 세탁기나 건조기는 사용 중이 아니면 대체로 문을 열어두므로 문이 닫혀있다면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 다음 행동을 취해주면 좋을 텐데 세탁기이건 건조기이건 그 문의 여닫힘은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볼 수 없으니 말해 주는 수밖에. 지시어가 남편의 뇌에 전달되면 비로소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잘하는 한 가지는 말을 하면 들어준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가 매일 다정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많다.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에 이르렀다 한들 연애만 하면서는 한 사람을 100%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 후 생기는 갈등 상황들은 필연적이다. 분리수거하기나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그냥 넣는 일 같은 걸로 싸우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테니. 분리수거 내가 하고 말지, 젖은 수건 내가 꺼내놓지 뭐, 앓느니 죽는다고 상대방에게 말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할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은 금방 지치게 마련이고 부부간 균형도 깨지게 된다. 이 사람을 내 입맛에 맞게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위험하지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무조건 존중해 달라는 태도 역시 위태롭다. 아내는, 남편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사랑의 다른 말은 배려이고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서운해 하지만 말고 콕 집어 말해주는 것도 배려의 한 방법이다.(콕 집어 그 부분만 말해야 한다, 사족은 금물)


가시가 잘 발라진 옥돔을 반찬 삼아 밥을 한 술 뜨려다가 남편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남편이 다음 식사 반찬으로 먹으려고 따로 둔 걸 수도 있는데 내가 다 먹어버리면 빈정이 상할 수도 있으니. 유치해도 먹는 건 중요한 문제라 확인해야 했다. 내 몫의 생선임을 알았으니 이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크고 두툼한 생선살을 집어 올리려는데 투명하고도 단단한 가시 하나가 단번에 눈에 띄었다. 은박지의 생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기도 또 저기도 가시가 박혀있었다. 공인인증서처럼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내 남편임이 인증되는 순간이다. 기왕 가시를 발라내는 거 세심할 수는 없었을까? 남은 가시들을 골라내자니 짜증이 살포시 올라왔다. 아니다 아니야! 그가 날 위해 가시를 발라놓은 그 마음 하나만 떠올리자!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 옥돔이랑 맛있게 먹고 있어?

- 응! 여보 근데 이거 가시 발라놓은 거 맞지?

- 당연하지! 왜, 가시 있어?

- 응, 엄청 커다란 가시가 엄청 많아. 마음 놓고 먹었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서 죽을 뻔했지 뭐야. 하하하.

- 따시! 암살 실패다! 크크크.

- 이깟 가시로 날 죽이려 하다니! 다음엔 좀 더 성의를 보이도록해.

흔한 부부의 더 흔한 대화이다. 남편이 촘촘한 사람이었다면 가시를 생선살로 위장해 암살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구멍이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가시가 남아있다는 나의 말에 가시를 발라줘도 고마워할 줄 모른다며 성을 냈을 수도 있다. 남편의 뭉툭함이 고맙다. 생선 가시 발라주는 남자를 남편으로 둔 덕에(비록 그의 암살 계획은 실패했지만) 아침부터 웃음지수가 1만큼 상승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금 한 꼬집만큼의 행복함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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