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변기 뚫어주는 건 빼박이다, 찐사랑
부부 사이에서도 감추고 싶은,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비밀이라기엔 너무 거창한. 일기장일 수도, 성형 전 얼굴일 수도, 늘어나는 뱃살일 수도 있다. 뮤지컬 배우로 유명한 한 연예인은 결혼 생활 10년이 넘도록 남편한테 생얼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 같이 살면서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그만큼 남편한테는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다는 말일 게다. 공시생 시절 남편을 만난 나는 생얼은 말할 것도 없고 질끈 묶은 머리에 츄리닝까지 온몸에 후줄근함을 걸치고 다녔기에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라면 더 숨길 것도 없다. 이는 남편도 마참가지. 서로에게 반한 지점이 겉모습이 아님은 확실하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었거나. 휴대폰은 물론 서로의 공인인증서까지 공유하는 우리이지만 아직까지 방귀만큼은 트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결혼 한 부부가 방귀를 숨기며 사는 건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쉬는 날에는 24시간을 붙어있기도 하는데 방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몸 밖으로 나오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집 안이라면 잽싸게 화장실로 향하고 밖에서 나란히 걷고 있을 때에는 슬며시 두어 걸음 멀어진다.(티 나지 슬. 쩍. 멀어지는 게 포인트이지만 아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문제는 차 안인데 이때는 괄약근에 힘을 꽉 주고 참는 수밖에 없다. 창문을 미리 열어두고 조금씩 내보내볼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위험부담이 있어서 빠르게 포기했다. 사실 완전한 방귀숨김은 어려운 일을 넘어서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름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설정한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화장실로부터 새어 나오는 어떠한 소리라도 우리 부부에게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인 것이다.
필사적으로 지켜온 방귀가 무색하게 최근 엄청나게 큰 위기가 찾아왔으니 바로 변기가 막혀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 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서 흘려보낸 것들이 쾌청한 소리를 내며 물과 함께 떠내려간 과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잠시 후 똘. 똘. 똘. 똘.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변기 커버를 열어보니 물이 다시 차오르지 않고 있었다. 맙소사! 늦은 시간이라 막힌 변기를 시원하게 뚫어준다는 화학세제를 사러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이 아기를 재우고 있어 이 상황을 아직 모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검색 창에 막힌 변기 뚫는 법을 입력하고 결괏값들을 검토해보니 뜨거운 물을 붓고 샴푸를 10번 정도 짜 넣은 뒤에 30분 기다린 후 물을 내리면 대부분 해결이 된다고 했다. 과정이 간단한 데다 뜨거운 물의 열기가 작용해서 이물질을 부드럽게 만들면서 해결이 될 수 있고 샴푸의 계면 활성제 성분이 작용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부연 설명이 꽤나 신뢰감을 높여주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바로 실행에 옮겼다.
30분은 더디게 그러나 꾸준히 흘러갔다. 남편은 원래 아기보다 먼저, 깊게 잠이 드는 사람이니 나의 거사는 들키지 않고 마무리되리라. 힘껏 물을 내렸다. 기대와 달리 물은 더디게 차 오르고 더 더디게 내려갔다. 다시 똘. 똘. 똘. 똘. 소리가 들렸고 나의 거사는 무참히 실패했다. 밤 사이 거실 화장실 대신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남편한테 알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변기가 막혀?’ 장난기 서린 눈으로 나를 놀려댈 남편의 얄미운 얼굴이 떠오르던 차에 남편이 거실로 나왔다.
- 뭐 해? 구시렁구시렁거리면서 혼자 뭐 하고 있어?
- 어, 그게...... 변기가 막혀가지고. 샴푸로 하면 된다고 해서 했는데......
- 변기 막혔어? 짜증 난다 어떻다 혼잣말 하는 소리 들리더니 이거였고만. 샴푸 그딴 거 다 소용없어. 그냥 뚫어뻥으로 뚫는 게 제일 빨라.
남편은 다용도실에서 뚫어뻥을 가져와서는 화장실 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첫째의 응가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나와 변기가 막힌 적이 몇 번 있었다. 몇 차례의 경험으로 뚫어뻥 사용이 익숙해진 남편은 이번에도 능숙하게 변기를 뚫어냈다. 촤아. 하고 막힘없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의 소리가 경쾌해서 박수까지 칠 뻔했다. ‘브라보! 장하다, 내 남편!’
- 첫째가 엄마 닮았구먼.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남기고 남편은 다시 잠을 자러 들어갔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사는 게 부부사이라지만 막힌 변기를 남편 손에 맡기게 될 줄은 몰랐다. 건수를 잡았다며 어린아이처럼 놀려대겠거니 걱정했는데 남편을 너무 낮잡아 보았나 보다.(낼 모레면 남편도 마흔인데...) 그러고 보니 아까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의 뒤태가 새삼 믿음직해 보였던 것도 같다. 어깨가 원래 그렇게 넓었던가? 어느새 쪽팔림은 사라지고 그의 듬직한 뒷모습만 뇌리에 남았다. 이번에도 남편 특유의 뭉툭함은 빛이 났고 설렘지수가 1만큼 상승했다. 막힌 변기를 군말없이 뚫어주는 건 빼박이니까. 찐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