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공무원 부부의 탄생
- 여보, 나 합격한 것 같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난밤 그는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부부싸움을 해도 머리만 땅에 닿으면 금세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지는 통에 나를 바짝 약 오르게 하는 사람인데 긴장감에 잠을 못 자다니. 덩달아 나도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사랑보다는 전우애에 가까웠다. 먼저 겪어보았으니 그 심정을 모를 리 없었고, 누워 있는다고 잠이 올 리도 없었다. 10년 전의 나 또한 최종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더랬다. 그때의 나도, 어제의 남편도 합격, 이 두 글자를 위해서라면 잠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허용되는 나이는 몇 살까지일까? 남편은 서른다섯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대리로 진급한 만 5년 차 직장인에서 좋게 말하면 수험생, 솔직히 말하면 백수가 된 셈이었다. 그가 '빛이 나는 솔로'였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그는 이미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이며(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이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다른 도전들과 달리 수험 생활은 실패할 경우 남는 게 없다. 실패에서 얻어지는 교훈조차 없다. 패배감과 무기력만 남는다. 이십 대라면 재빠르게 취업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도 있겠지만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달린 삼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는 합격뿐, 선회할 다른 길은 없었다.
오전 10시를 갓 넘긴 2023년 8월 21일. 남편이 치른 지방공무원 임용 시험의 최종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최종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의 땀과 노력이 이 한 문장 안에 배어있을 터였다.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제목을 단 글을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은유나 비유나 어떤 꾸밈도 없이 간결한 제목이지만 쉽게 손에 닿지 않았다, 꼬박 3년이 걸렸다. 모든 도전의 끝이 성공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은 이런 기도까지도 하게 했다, '로또 되지 않아도 좋으니 합격만 하게 해 주세요.'
하루종일 축하 전화가 이어졌다. 심지어 엄마는 우셨다. 딸인 내가 합격할 때도 울지 않았는데 사위의 합격 소식은 감회가 남다르셨나 보다. 하긴, 어떤 장모가 딸은 일하고 사위가 노는(놀지는 않았지만) 걸 좋아하겠는가. 딸이 괜찮다고 하니(둘째가 생겼을 때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았다.) 그동안 내색은 못했지만 어지간히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엄마 아빠는 사위가 퇴사를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고 한 이후로 시험과 관련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으셨다. 우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말 못 하는 사정은 오죽하겠느냐며 두 분 이서만 사위의 불합격을 짐작할 뿐이었으리라. 필기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부터 사위가 어디 무슨 계약직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고 하니 불합격을 확신하셨을 터였다.
남편에게 오롯이 공부할 시간을 주고 싶어서 5월 말부터 나는 육지 친정에 가 있었다. 100일도 안 된 둘째에, 첫째도 아직은 돌봄의 손길이 필요하다 보니 남편이 100%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갓난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느라 잠도 못 자고 분투 중이었으므로 첫째 등하원에 쓰레기 분리수거 등 남편 몫의 집안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비행기를 탔다. 지방직 공무원 필기시험은 6월 10일(토요일)에 치러졌다. 가채점 점수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않아 불합격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선발 인원이 30명으로 워낙 소수이다 보니 합격 커트라인이 높을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남편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일할 곳을 찾았다. 공공기관의 6개월 계약직에 선발되어 내년에 한 번 더 시험을 볼지(점수가 나쁘지 않았기에) 아니면 공부를 접고 다른 길을 찾아볼지 12월 말까지 고민할 시간을 벌었다. 티셔츠에 츄리닝만 입다가 오랜만에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낯설면서도 좋았다. 최저시급으로 계산될지언정 월급이란 걸 받게 될 것도 좋았다.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손을 꼭 잡고 앞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이 신께서 보시기에 흐뭇하셨을까? 필기시험 합격이라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선물을 받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면접 준비는 필기시험 준비보다 더욱 짙은 안갯속을 지나는 과정이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하고 암기해서 그야말로 옆구리 탁 찌르면 원래부터 알고 있던 지식이었던 것처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무원 의무나 징계의 종류처럼 단순한 질문부터 상황대처 능력을 보기 위한 압박 질문까지 최종 합격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크고 높아 보였다. 출근도 계속해야 했다. 면접에서 15명이나 떨어지는 마당에 남편이라고 안전할까. 남편은 필기시험 합격자 중에서도 꼴찌에 가까웠다. 면접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시험 성적순으로 당락이 결정될 테고 그건 남편에게 불리했다. 남편은 퇴근 후 독서실로 향했고 나는 또다시 두 아이의 독박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남편의 수험 생활에 마침내 마침표가 찍혔다.
- 이번에 떨어졌으면 나는 완전히 무너졌을 거 같아. 남편의 말에 울컥, 심장이 딱딱해졌다. 합격은 아내인 나도, 아이들도, 부모님도 바라는 일이었지만 남편 자신에게 가장 절실했음이다. 20대에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취업을 했고, 퇴사 후 30대에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돌고 돌아 합격하기까지 3년의 시간 동안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세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의 경쟁자들은 체력도 뇌도 팔팔하고 싱싱한 20대 초중반이 대부분일 터. 부족한 체력과 떨어진 뇌기능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극복한 남편의 노고에 심심한 축하를 건네고 싶다.
- 여보,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