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좀 어때!
좋은 집보다는 예쁜 집에 살고 싶다. (보통은 좋은 집이 예쁜 집이긴 하지만) 심플하고 모던하게 정리된 집이 내게는 예쁜 집이다. 단순하고 깔끔한 집을 위한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우기인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괴리 때문에 나는 오늘도 괴롭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집에 들인 물건은 바로 정리바구니. 아이의 초코파이와 나의 몽쉘과 남편의 핫초코 그리고 마스크를 비롯한 기타 잡동사니들이 무질서를 질서로 여기며 어지럽게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있던 수납장 한 칸이 시작이었다.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하자 눈길이 미치는 곳곳이 눈엣가시였다. 싱크대 속 라면도, 옷방 안 화장품도, 아이의 레고블록도. 정리를 위해서 정리바구니가 필요해! 때마침 할인행사까지 하고 있으니 이건 사치품이 아니라 가치품이라는 그럴싸한 논리를 앞세워 스스로를 납득시키는데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공부하기 전에 책상을 정리하고, 방을 청소하는 사람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운동복부터 운동화까지 풀세트로 장착하는 사람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면 되고, 운동을 하려거든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무얼 하기 전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리를 하자고 마음먹고 나서 가장 먼저 정리바구니를 집에 들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버리기를 먼저 했을 텐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이렇게 또 한 번 참으로 판명되고야 만다.
네모 반듯하게 칼각을 잡고,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집을 고수하는 성격은 못 된다. 적당히 어질러진 상태로 대부분의 날들을 보낸다. 마음도 그렇다. 어느 정도는 풀어지게, 나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랬던 때도 있었다. 학원 일은 보통 밤늦은 시간에 끝나니까 집에 오면 12시가 다 되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 일주일에 두 번은 어학원에 가고, 하루는 종로에 있는 영국문화원에도 가고, 또 하루는 강남까지 스터디를 하러 다니고, 오가는 차 안에서는 책을 읽고, 학원 일이 없는 주말에는 과외를 하고. 공부는 곧잘 했는데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한, 쉬지 않고 일은 하는데 계속 가난한 내 삶의 부조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때 이미 들켰을지도.) 자기 계발과 자기 학대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며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세워두었다. 이십 대의 일이다.
공무원이 되고 가장 좋았던 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학원 강사를 할 때 엄마 친구들이 딸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으면 엄마는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했다. 그럼 '학교 선생이여?' 하는 질문인지 확인인지 모를 의문문과 함께 '아들은 사법시험 합격하고 딸은 학교 선생이고 집이는 뭔 복을 그렇게나 타고났어!‘ 하는 말들이 덧붙었다. 겸연쩍어진 엄마는 '학교 아니고 학원에서 가르쳐. 돈도 잘 벌고 얼마나 착한지 몰러. 지 오빠 공부시키느라 얘가 고생이지.' 부연설명을 길게 했다. 나는 착하지가 않아서 엄마가 착하다고 말할 때마다 싫었다. 내가 공무원이 된 이후로 엄마의 대답이 한결 짧아졌다. 아들은 변호사이고, 딸은 공무원이여.
요즘 들어 부쩍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뒤죽박죽이다.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호르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라고 추측을 하고는 있지만 영 개운하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다. 나 하나 가까스로 추스르며 사는 것도 버거운데 일곱 살이 된 아이가 하나 있고, 이제 또 갓난아기를 키우려고 생각하면 아득하기가 그지없다. 휴직을 할 수 있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휴직한 이후에 그대로 복직을 하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다. 그럼 다시 나를 길게 설명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짧게 설명할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로또 1등 됐어!
30년 지기 중 한 명한테서 문자가 왔다.
- 나 J. 번호 바꿨어. 카톡은 전번 정리하고 주말에 설치하려고. 그때 말 걸게^^
오키~ 짧은 대답을 보냈다. 이십 년 가까이 쓴 번호를 바꿀 생각을 한 걸 보니 요즘 인간관계가 많이 무거워진 모양이다. 늘어진 가지들을 가지치기하듯 거추장스러운 머릿속을 가지런히 정돈하는데 정리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으니 갑자기 왜 번호를 바꾸냐는 하나마나한 질문은 생략했다. 무슨 일이냐고, 술 한잔 하면서 얘기 좀 하자고 설명 내지는 해명을 하라는 주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났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겠다고 답한 건 삼십 년을 보아온 너희뿐이었다고 J가 말했다.
J가 휴대폰 속 사람들을 정리하는 시간 동안 나는 정리바구니 안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던 사물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초코파이를 가지런히 놓으며 다음에는 할인을 해도 30개입은 절대 사지 말아야지. 몽쉘 상자 안에 몽쉘이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며 언제 이렇게 다 먹었지? 출산 때까지 좀 더 조절해야지. 핫초코의 계절이 거의 다 끝나가는군. 마스크는 더 사지 않아도 충분하겠지?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 샘플이나 사은품으로 받은 자잘한 것들은 버려버리자. 손길이 닿는 곳에 어수선한 마음 한 줌씩을 덜어냈다. 정리를 하자고 정리바구니를 구입하는 게 합리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카드 값 300만 원을 걱정하더니 오늘은 또 무언가를 사들인 내 모습은 모순 그 자체이다. 그런데 또 아무렴 어떠랴. 그 옛날 가수 신승훈은 어제는 사랑을, 오늘은 이별을 했고, 어떤 작가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한 것처럼 이치에 맞게만 삶이 살아지지는 않는 것을. 정리를 위해 정리바구니를 산 아이러니 설명이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