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을 모아보자. 태산은 아니라도 동산은 만들 수 있겠지.
- 여보 카드 값 150만 원 보내줘.
- 150?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 근데 나 뭐 별로 쓴 것도 없어. 봐봐.
남편이 휴대폰을 꺼내 카드 이용내역을 보여준다. 사실 보여주지 않아도 안다. 남편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사람도 아니다. 남편의 고정비용인 독서실 이용료와 주유비를 제외하고는 집 앞 마트에서 라면이나 계란, 아이 과자, 아니면 공부하다 배고플 때 편의점에서 사 먹는 삼각김밥이 전부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리자 다 고만고만한 금액들이었다. 어쩌다 우리 세 식구 외식하며 결제한 4-5만 원이 눈에 띌 정도로 나머지는 소소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1-2만 원이 여럿 모여 150만 원이 된 것이다.
남편의 카드값 만이라고 하면 선방일 텐데 내가 사용하는 카드도 있다. 내 카드로는 관리비, 가스비, 아이 학원비, 통신비 등 굵직굵직한 항목들이 결제가 되는데 겨울이니만큼 난방비가 많이 결제되었다. 그동안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있다가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아이의 수영과 미술학원 수강료도 합치면 30만 원 가까이 된다. 그저 숨만 쉰다고 해도 80-90만 원은 무조건 지출이 되는 금액이라는 건데 나는 숨만 쉬는데 그치지 않고 자꾸 뭔가를 샀다. 책도 사고, 반찬도 사고, 아이 옷도 사고. 결국 내 카드 대금 청구서도 150만 원이 넘었다. 둘이 합쳐 카드 값이 300만 원인 셈이다.(보험 및 적금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7급 8호봉이래 봤자 이거 떼고 저거 떼면 200만 원 조금 넘게 통장에 들어온다. 쓰는 돈에서 매 달 100만 원 정도가 모자라단 말인데 이는 남편이 공부 시작할 때 퇴직금과 전별금, 적금, 기타 보험 환급금 등을 모아 따로 마련해 둔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남편의 수험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계획했던 당초 예산보다 지출이 많아지게 된 점은 유감이긴 한데 언제는 뭐 삶이 예상대로 착착 살아졌던가? 사는 데 돈이 중요한 건 맞지만 절대적이진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최선을 다한다고 늘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안다. 지금은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해야 할 때이다. 남편은 공부를, 나는 일을. 그런데 한 가지 변수, 출산이 코 앞으로 다가와 출산휴가와 휴직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불안요소가 되어 자꾸 나를 흔들었다. 유급이라 하더라도 수입이 반으로 혹은 더 많이 줄어들 게 뻔하다.(2023년도 출산 부모에게 매 월 70만 원씩 지원금이 나오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여보, 앉아봐.
- 카드값을 줄여야 할 것 같아. 보험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부부가 식탁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남편의 카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유비. 각자의 차로 남편은 아이 등하원, 나는 출퇴근을 했는데 한 차로 움직이기로 했다. 남편이 아이 등원을 하며 나를 내려주고 다시 아이 하원을 하며 나를 데려가는 방식이다. 남편이 직장을 다닐 때 가입했던 운전자 보험도 손보기로 했다. 은행에서 판매하는 보험을 해지하고 다이렉트 보험으로 갈아탔더니 보험료도 저렴해지고 이전 보험의 해지 환급금도 얼마 들어왔다. 다음은 내 차례. 내가 가장 많이 돈을 쓰는 분야는 로켓배송을 해주는 쇼핑앱. 집 앞 마트에 팔지 않는 주스, 하나씩 사면 비싼 초코우유 같은 아이 간식을 구입하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데 한 번에 하나씩이 아니라 한 번에 많이 사는 게 문제였다.
이게 다가 아니다. 마흔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불혹의 나이라 했건만 순 거짓부렁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유혹에 취약한 편이고 특히 할인 쿠폰에 약하다. 집 앞 프랜차이즈 빵집과 통신사가 제휴를 해서 50%씩 할인 행사를 해줄 때면 -50%가 눈에 동동 떠다니는 탓에 당장 필요한 양보다 많이 사게 된다. 편의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요거트 우유, 커피, 아이스크림처럼 관심 상품이 2+1인 경우 하나만 사도 될 걸 꼭 2개를 사서 +1을 챙기고야 만다. 어떻게 보면 할인을 받아서 구입하는 만큼 살림꾼 면모를 갖춘 듯 하지만 실상은 불필요한 지출이 더 많다. 점검을 했으니 개선이 시급하다. 이제부터는 한 번에 하나씩, 필요한 만큼만 구입하기로 한다.
순탄하게 소비의 방향을 잡아가던 때에 한 가지 고민되는 지점에 부딪혔다, 책을 구입하는 돈. 1월 시작하면서 yes24 골드 등급에 이어 2월이 되자 플래티넘으로 등급이 올라갔다. 이걸 어쩐다... 명색이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작자가(작가 아님) 책 사는 데 돈을 아껴서야 될까 싶으면서도 당장 마이너스 지출을 하는 실정인데 책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 내적 갈등이 깊어졌다. yes24 온라인 중고서점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책의 상태에 따라 최상-상-중-하로 등급이 매겨져 있고 가격도 그에 따라 상이한데 최상의 경우 30-3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 중이었다. 개인 간 중고책 거래보다는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중고서점이 책 관리도 덜 잘 되어 있겠지? 또 2만 원 이상이면 무료배송도 가능했다. 시험 삼아 도서관에서 대여해 이미 읽었던 책 중 소장하고 싶었던 몇 권을 최상의 상태로 찾아 결제했다. 며칠 뒤 정말 새 책 수준의 책들이 도착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찜찜했다. 이 책들을 중고서점에 판매한 이들은 그 돈으로 또 다른 신간을 샀으리라고 믿는다. 책 판매의 선순환을 위해서, 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 우리 집 마이너스 지출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
넘치게 생활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왔는데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걷어내고 뺄 수 있는 지점들이 보였다. 1천 원, 2천 원이 모이면 몇 만 원이 되고 몇 만 원이 다시 모이면 몇 십만 원이 절약될 것이다. 티끌을 모아 태산, 아니 동산이라도 만들어야겠다. 이런 와중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기부 1주년 기념 우편물을 집으로 보내왔다. 기부 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굿네이버스 생리대 후원을 추가로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튀르키예 지진 복구를 위한 기부금을 보냈다. 적은 돈의 쓰임은 다양해서 모여 모여 카드 대금 청구서가 되기도,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기부를 시작한 셈인데 나름의 이유는 있다. 세상을 살면서 뭘 하기에 적당한 때란 기다려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먹은 지금이 바로 그 무엇을 할 때이다.
고민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잘 살기 위함이다.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잘 살고, 10년 후, 20년 후에도 잘 살고 싶어서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통장 잔고를 살핀다. 그런데 잘 사는 건 뭘까? 근본적인 물음에는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자고 일어나니 지진으로 땅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너진 사람들이 저기에 있는데 나는 카드값 300만 원을 들여다보며 걱정을 하고 있다. 각자 운명에 맞게 사는 거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무겁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아 맞다, 로또 사야 하는데. 일상의 가벼움을 빌려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