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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Feb 07. 2023

밤 12시에 김치찌개를 끓였다

나는 즉흥적인 사람인가?

간헐적 분리수면으로 변질되긴 했으나 오늘은 혼자 자겠다는 아이를 재워주기 위해 동화책 3권을 들고 아이방에 가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잠이 들고 나면 남편이 올 때까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 여보, 밥 해야 돼. 몇 시에 올 거야?

- 알았어. 12시? 졸리면 먼저 자.

- 책 읽고 있어.

쌀컵으로 두 컵을 떠서 쌀을 씻고 밥통에 담아 취사 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모든 절차가 똑같은데 미세한 차이로 남편이 한 밥이 더 꼬들꼬들하고 맛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은 우리 집 밥을 지키는 수호천사이다.(아이 유치원에서 매일 학교로 치면 당번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를 뽑아 수호천사라 부른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딱 밥까지 만이다. 남편이 분리수거와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기에 그가 요리까지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빨래와 음식 준비는 내 담당이지만 배달 반찬도 반찬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에 나 역시 지금의 가사분담에 큰 불만이 없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남편에게 문자로 내일 아침 먹을 밥이 없음을 알렸다.


남편이 올 때까지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명치까지 불러온 배 때문에 앉아있기가 힘들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드러누워 손 닿는 곳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소파 위에는 늘 서너 권의 책이 놓여있다. 거실에 TV가 없는 데다 책장까지 가는 것도 귀찮을 때가 많아 책 몇 권씩은 소파 위나 침대 옆에 꺼내두는 습관 때문이다. 황정은 작가님의 <연년세세>를 읽고 있었는데 불현듯,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김치냉장고에 보관 중인 돼지고기 오겹살이 생각났다. 진공포장된 생고기라 얼리기 아까워 김치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것인데 아무리 밀봉이 되었다 하더라도 얼른 먹어야지 까딱 잘못했다간 아까운 고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음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엽 감긴 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책을 두는 건 오랜 습관이다 >


오겹살을 넣은 김치찌개, 오늘은 너로 정했다. 가만, 김치찌개를 끓이려면 쌀뜨물이 있어야 되는데... 남편이 오기 전에 밥을 안치기로 했다. 쌀을 씻어 쌀뜨물은 따로 받았고, 오겹살 한 줄 반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뚝배기 맨 아래에 깔고 김치를 자박자박 썰어 그 위에 올렸다. 받아놓은 쌀뜨물을 붓고 가스불을 켠 뒤, 뚝배기 가장자리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고체로 된 육수 한 알을 넣었다. 두부와 파를 송송 썰어 김치찌개에 막 올리자마자 남편이 들어왔다.

- 뭐 해?

- 내일 반찬이 없어서. 고기도 정리해야 하고.

- 책 본다더니, 여태 책 보다가 갑자기?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12시야 12시.

그랬다. 고기에 꽂혀서 김치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쌀을 씻느라 싱크대에서 물을 사용한 게 좀 걸리긴 했지만 나머지 재료들을 준비하는 데는 시끄러운 소리가 날 만한 게 없어 다행이었지 이웃에 민폐를 끼칠뻔했다.


여보는 좀 즉흥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가던 남편이 한 마디 흘렸다. 맞아, 나는 왜 이렇게 즉흥적이지? 가스불을 끄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즉흥적인가? 하는 생각이 곧바로 꼬리를 물었다. 반찬이 꼭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보통 아침은 계란후라이와 김이면 충분하니까. 아마도 고기를 냉장고에 보관하면서부터 이건 조만간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걸 계속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먹을 양을 남기고 나머지를 얼려도 되겠지만 어떻게 먹을지 아직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5줄의 오겹살을 구워 먹는다고 하면 세 식구가 한 끼에 다 먹을 수 있을 테고, 지금처럼 찌개를 끓인다고 한다면 한 줄에서 한 줄 반이 필요하므로 나머지는 다시 보관이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판단되는 그 시점에 실행한 것인데 하필 그 시간이 자정이었던 것이다.


보통 MBTI 성격유형에서 J는 계획형, P는 즉흥적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P에 속한다. ESFP. 그렇다고 충동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치아 교정을 시작할 때 동네 산책을 하다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치과에 상담을 받으러 갔었다. 톡 튀어나온 앞니 2개가 스무 살 이후 내내 거슬렸는데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지금'이 교정을 할 때라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시기는 즉흥적이었을지라도 교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충동적으로 한 건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서른 살에는 학원 일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다. 진로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있었고 고민의 끝에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몇 살까지 돈을 얼마를 모으고 몇 년 더 일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에 주변에서는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결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겠다. 밤 12시에 김치찌개를 끓이는 나를 보고 남편이 한 말도 비슷한 맥락일 거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나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MBTI로는 'E'유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쉽게 피로를 느낀다. 오히려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편안하다. 여행을 가거나 글 쓰는 일에는 계획적이지 않으나 일을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출근 전에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퇴근 후에 내일 할 일을 염두에 둔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는 이런 것 같아, 하고 말해줄 때 내가? 하고 놀랄 때가 있고 내가 그런 면이 있지, 하고 수긍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 데 있다. 어떤 사람도 종이 단면처럼 한쪽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앞 면 뒤에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는 내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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