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육아휴직 도, 도전?
- 점심 같이 먹을까?
공무원 시험이 끝난 뒤 공공기관에서 계약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남편은 종종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온다. 육아휴직 중인 내가 집에 있고, 요즘 한창 꼬물거리며 예쁜 짓을 하는 둘째를 볼 수 있는 데다 근무지 주변에 식당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오면 조금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잠깐이나마 수다를 곁들일 수 있고 10분 남짓일지언정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12시 15분이 다 되도록 남편에게서 출발한다는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사무실 사람들과 이미 식사 중이었고 미리 연락하는 걸 깜빡했단다. (한결같이)무심한 남편을 미워하지 않으려면 혼자 먹을 점심 메뉴는 더없이 맛있어야 했다. 채끝을 구워 올린 짜파게티면 적당할 듯 싶었다. ‘아싸, 소고기 다 내 거!’ 달궈진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올리브오일을 살짝 두르고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한쪽에서는 고기가 익어가고 한쪽에서는 짜파게티 면이 부풀고 있었다. 다행히 아기의 낮잠과 내 점심 타이밍이 잘 맞았다.
육즙을 머금은 소고기 한 점을 짜장소스 짙게 밴 면발로 감싼 뒤 크게 한입 먹었다. 다음에는 호로록 면을 먼저 삼을 삼키고 고기를 뒤따라 넣었다. 이리 먹으나 저리 먹으나 소고기는 고소하고 짜장라면은 달짝지근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출근 중이었다면 끝나가는 점심시간을 못내 아쉬워하며 터덜터덜 사무실로 들어섰을 시간이었다. 친한 동료와의 선약은 오전 근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이거 빨리 해치우고 점심 맛있게 먹어야지.‘ 점심시간은 직장인에게는 얼마나 큰 즐거움이던가.
두 번째 육아휴직 중이다. 오늘처럼 남편이 마치 직장 동료인 양 점심 제안을 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점심시간이란 게 없다. 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어떤 날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한 끼로 때우는 날도 있다. 메뉴는 주로 밥, 김, 계란후라이 세트 혹은 라면이다. 약간의 핑계를 대자면 아기가 잘 때 후다닥 먹을 수 있는, 조리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종류를 고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 불량 식단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지난주에는 3일 내내 양배추계란전을 부쳐 먹었다. 양배추, 양파, 대파, 버섯, 당근 같은 야채들을 시간이 날 때 썰어두기만 하면 계란물 입혀 익히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간단하고 맛도 좋은데 영양까지 챙길 수 있어 집에서 혼자 점심 먹는 이에게 딱이다.
점심 시간이 따로 없는 것 이외에도 출근을 하지 않는 일상은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아침에 기상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아기가 6-7시 사이에 분유를 먹기 때문에 평소 출근시간보다 일찍 일어난다.) 옷방에서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실제로 올해 여름엔 옷을 단 한 벌도 사지 않았다.) 통장에 꽂히는 급여는 절반 이상 줄었는데 집에서 하는 일은 늘었다.(맙소사!) 회사에 다닌다는 건 집안일에 소홀해도 된다는 무적의 면책사유였는데 하루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자동으로 구석구석 자꾸만 손이 간다. 먼지는 왜 이렇게 빨리 쌓이고 빨래는 왜 맨날 해도 줄지를 않는 건지. 손에서 걸레가 떠날 날이 없고 세탁기도 하루 최소 2번은 돌아간다. 젖병을 씻으면서 손에 물 묻힌 김에 밥그릇 두어 개도 바로 씻어버리는 통에 식세기 이모님은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시다.(대신 청소기 이모님이 열일 모드 중이시다.)
남편이 올 때까지 젖병을 닦지 않거나, 아이들을 씻기지 않고 기다려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집안일을 두고 완력 다툼울 하는 신혼부부가 아니다.(사실 첫째 육아휴직 때는 이 문제가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남편도 집에 오면 나 못지않게 쉴 틈이 없다. 쓰레기 정리, 첫째 저녁밥 챙긴 뒤 놀아주기, 둘째 안아주기, 그리고 하루종일 고생한 아내에게(그렇다, 바로 나다.) 수고했다며 관심을 표하기. 그의 하루도 고단하기는 매 한 가지일 텐데 굳이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일을 미루어 무엇하랴. 함께 늙어갈 앞으로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르르 불타는 사랑보다는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은은한 마음일 것이다.
첫째를 낳고 육아 휴직을 할 때만 해도 삼십 대 중반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저연차 공무원으로, 공직에 들어왔으니 ‘관’은 달고 퇴직하리라는 야무진 꿈을 꾸던 때이기도 하다. 아이를 잘 돌보고 싶은 마음과 승진하고 싶은 갈망이 매일 충돌하니 속이 시끄럽고 육아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두 번째인 지금은 다르다. 6년의 시간이 지났고 나도 변했다. 일에서 찾으려던 성취감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에너지로 바뀌었고, 두 아이를 잘 키우는 게 승진하는 것보다 중요해졌다. 나름 육아 경력자로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육아가 재밌기까지 하다. 할 수 있다면(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만) 무급일지언정 보장된 육아 휴직을 다 사용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들 곁에서 살가운 시간을 보낼 날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지난 6월, 인천관광공사와 한미글로벌에서 셋째를 낳으면 무조건 특별승진 해주겠다는 출산장려정책을 발표했다. (각각 인천관광공사 셋째 출산 땐 ‘승진’…둘째 출산하면 인사 가점, 서울신문, 2023. 06. 13, "셋째 낳으면 무조건 승진"… 한미글로벌 파격실험, 매일경제, 2023-06-08 17:35:55) 이를 알게 된 남편이 만약에 공무원도 이런 혜택이 생기면 셋째를 낳을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마흔둘에 둘째를 낳아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면 내 나이가 쉰이거늘, 셋째 같은 소리 하고 있다고 쌍심지를 켜며 반대의사를 표했지만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정책이 정말로 현실이 된다면 또 모를 일이다. 머지않아 세 번째 육아 휴직을 하게 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