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개봉 박두!

그때 그 시절...

by 아이리스 H

"아~~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으며, 말없는 3.8선도 울었습니다."

짜지 짜지 짠짠.. 나의 아버지는 마이크를 들면 언제나 이렇게 웅변을 하신다.


택배 박스 아니다.

선물박스도 아니다.

그러면??

이사를 하고 보물 박스 하나를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다. 문득 궁금함에 박스를 개봉했다. 보물들은 자다가 깨어나 오랜만에 나의 손에 붙들려 공작새가 꼬리를 펼치듯 짜잔! 개봉 박두!! 되었다.


쾌쾌 묵은 스케치북은 아버지가 기록해 놓은 나의 성장 일기이다. 태어나서부터 결혼 전까지의 기록들을 날짜별로 세세히 몇 줄 메모와 사진 그리고 상장, 통지표, 수험표, 합격증까지... 붙이고 꾸며서 한 권의 스케치북을 완성하셨다. 그 스케치북을 내밀며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남편의 손을 거쳐 나에게로 돌아왔다.


엄마품에 안긴 내 모습, 아버지 품에 안긴 언니이다.


젊은 날의 아버지 엄마보다 이제 나는 더 나이가 들었다. 뒷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이 인상적이다. 할머니 댁으로 기억난다. 흑백사진 속 그게 나인지? 구별 조차도 할 수 없는 사진이 맨 첫 장 맨 앞에 있다. 태어난 곳을 아버지는 그림으로 그려 놓으셨다. 빛바랜 흑백사진이 눈물 나게 고맙다.


그저 아버지의 기록으로 나라는 걸 짐작할 뿐 전혀 기억조차 없다. 얼마만의 흑백사진인지? 게다가 남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과 그네를 타고 있는 촌스러운 모습의 나를 마주했다. ㅎㅎ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을 만큼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나의 뿌리와 근원을 세세히 기록해 놓으신 아버지에게 감사한다.




1978년도 나의 일기장이다.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일기를 썼다.

세상에나... 초등학생이다.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모양새를 하고, 연필의 질감도 흐릿하고, 거친 종이의 숨결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내 손끝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종잇장을 넘겨본다. 한낮, 혼자서 과거로의 추억 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멈춘 듯 7권이나 되는 일기장이 책 한 권처럼 술술 읽혔다.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고, 아버지의 훈계와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웠다. 담임 선생님의 섬세한 볼펜 자국들이 이곳저곳... 맞춤법도 틀렸지만 멋진 싸인까지 보인다.ㅎㅎ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일기장 속에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함께했던 죽마고우의 이름이 자주 나왔다.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매일 쓰며 소녀는 주절주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꼬박꼬박 일기를 써 내려간 나의 과거 속 꼬맹이 소녀에게 급 칭찬을 하고 싶다. 참 잘했어요!


통지표도 있다.

우~~ 가 많네 ㅎㅎ 양가집 규수(양이나 가를 받으면)는 아니라 다행 ㅎㅎ 우... 미한 성적이다. 너덜너덜 낡고 허름한 통지표 속의 나를 기억의 저편에서 데려와 보듬어 안아준다. 괜찮아~~ 잘 살아 냈잖아~ 성적이 좀 낮으면 어때? 보통사람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거... 딱 중간ㅎㅎ


상장들도 있다.

그중에서 미술대회에서 받은 상장 속으로 잠시 휘리릭 빠져본다.


4남매의 둘째인 나는 중간에 끼이다 보니 언니의 옷을 물려받거나 학용품을 같이 쓰곤 했다. 그다지 내 것이 갖고 싶다는 생각도 욕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 반 대표로 군청 앞 미술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크레파스는 이미 새끼손가락보다 짧다. 크레파스 박스는 구석이 뭉개진 채로 고무줄을 감고 미술대회에 참가했다.


그날 나는 부끄러워서 친구들을 등지고 저만치 떨어져 나무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친구들은 군대회라서 새로 산 크레파스를 사들고 왔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내 마음은 이미 누덕누덕 꿰매어야 할 정도다.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크레파스를 감싼 종이마저 벗겨져 내손은 온통 칼라로 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마저도 고무줄이 헐거워져 크레파스들이 자기 맘대로 탈출했다. 달그락달그락 빠스 락 빠스 락 뒹굴뒹굴 가방 속에서 요란하다. 크레파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싫었다. "다녀왔습니다. " 엄마는 나를 기다리며 좋아하는 찐빵을 잔뜩 쪄놓았다. 그러나 본체만체 내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림을 그리러 나가지 말걸... 가난이 싫었다.

전교생 조회가 있던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마이크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금상 아니고 은상이다. 나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상에 올라가 받아야 하는데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갔던 그때가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줄지어 서있던 친구들의 부러움과 박수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모나미 왕자 파스 최고급에 금장을 두른 36색의 2층으로 나뉜 크레파스를 사주셨다. 펄쩍펄쩍 뛸 듯이 기뻤다. 무뚝뚝 하지만 정이 많고 섬세한 아버지의 볼에 뽀뽀를 여러 번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난 미술시간만 되면 친구들에게 은근 크레파스를 자랑했다.


어찌나 좋았는지? 친구가 빌려가는 게 싫었지만 절대 부러뜨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겨우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 더 이상의 큰상은 타지 못했다. 난 보통사람이니까ㅎㅎ 그 후 중학교에 가서도 미술반을 했지만 그때는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했기에 난 붓을 내려놓고 펜을 잡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후회는 없다.




소중했던 지난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켜준 나의 아버지께 감사하고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담은 일기장을 보며 과거의 흔적으로 현재를 살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하찮은 삶은 없다. 비록 1등만 알아주는 세상이라지만 꼴찌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보통사람에게도 가끔 기적 같은 날이 온다고 믿는다.


80대 아버지는 50대 딸에게 어릴 적 예쁜 옷 못 사줬다며 시골장터에서 요즘도 심혈을 기울여 엄청 시골티 팍팍 나는 예쁜 옷을 자꾸 사주신다. 괜찮다고 극구 사양해도... 여전히 아버지 눈에는 내가 마법의 공주처럼 보이나 보다 아니면 시력이 많이 안 좋은 거다."우리 딸 이쁘네" 아버지가 사준 옷을 입고 재롱을 부릴차례다.


아버지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가난에서 벗어났고 4남매 모두 아버지의 성장일기를 받았다. 가난했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버지는 펜을 놓지 않으시고 기록을 남겨주셨다. 돈보다 더 값진 정신력을 물려주셨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암기했던 그때 그 시절 미술시간이 있어 행복했고, 일기장이 있어서 그저 좋았던 날들은 든든한 뿌리가 되어 비바람과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었고 이제는 나의 아들들에게 그 정신력을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앗싸!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밭에 앉았는데...
도대체 한 사람도 즐겨 찾는 이 하나 없네
.......(중략)

호랑 나비야 날아봐!
하늘 높이 날아봐!
호랑 나비야 날아봐!
구름 위로 숨어봐~~
.....(생략)


호랑나비춤은 쓰러질 듯하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쓰러질 듯 추는 춤이다. 한때 유명했다. ㅎㅎ아버지도 엄마도 하하하 호호호 웃으신다. 웃음소리가 거실에 가득 찼다. 난 두 아들의 엄마이고 한 남편의 아내인데... 아버지 엄마를 만나면 여전히 귀여운 딸내미다.


보물 박스 속 추억하나 꺼내어 그 옛날의 나를 만났다. 아버지의 뜻처럼 잘 살아가고 있다.

딸을 시집보내며 써주신 스케치북 속 아버지의 글을 공개한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올추석엔 타국이 아닌 고국에서 아버지 엄마와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

멀리 딸을 보내고 날마다 기다림으로 사셨을 부모님 정말 사랑합니다.올 추석엔 아버지의 웅변을 들을수 있을것 같다. 짜지 짜지 짠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