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나 왔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시에 당당하게 입장하는 큰아들의 목소리다. 벌써 여러 날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놀랍지도 않다."왜? 또?"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혼자서 독립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친 큰아들이 자꾸만 집으로 온다. 그런데 반가움보다 걱정이 된다. 집으로 오는 게 당연한 건데...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건만 아들은 출. 퇴근을 아산에서 서울 강남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엔 놀랐고 지금은 둔해졌다. 어려서부터 엉뚱 모드(사차원)라 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중2 때 김구 선생님의 위인전을 읽고 중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우길 때도, 이미 중국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게임만 엄청 하며 놀 때도, 마킹 실수로 대학입시를 망쳤을 때도 겁내지 않던 아들이었다.
"엄마, 엄마, 괜찮아?"
난 머리에 해머 맞은 사람처럼 해롱해롱 했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했다. 대학 입시 답안지를 확인하러 학력평가원까지 갔었다. 담임선생님도 의아해하시며 확인하고 오라 하셨다. 아뿔싸~
돌아오는 길 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답안지를 15번부터 밀려 썼다. 분명 높은 점수를 기대했던 과목의 점수는 반토막 났다. 그러나 재수를 원하지 않았고 점수에 맞추어 대학에 가게 되었지만 군대 전역 후, 재도전을 하여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그 후, 난 베트남 하노이로 남편을 따라가게 되었고 아들은 혼자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며 잘 지냈다.
"엄마, 엄마, 나 연극할래요~"
아들은 중국어를 전공했고 영어도 잘하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언어 쪽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수학을 잘 못해서 자신의 소원도 수학 100점을 맞는 것이었으나 끝내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엄마가 베트남으로 가고 없는 동안 아들은 이 세상이 온통 놀이터였다. 코로나가 오기 전부터 코로나 세상을 비껴갈 만큼 아들은 아르바이트의 달인이 되어갔다.
용돈 독립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핸드폰 요금도 못 내고 SOS를 했던 아들은 언제나 엉뚱 발랄했다.
엉뚱이 시리즈는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부터 정점을 찍었다. 갑자기 개그맨이 되겠다며 대학로의 연극무대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청소부터 티켓 판매와 허드렛일을 하며 늦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엑스트라 배역을 하게 되었다며... 초록색 운동복을 입고 바보연기를 했다. 난 친구와 아들의 첫 무대에서 박수를 쳐주고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연극을 함께한 배우들의 간식도 조금 챙겨갔다. 다행스럽게 아들은 그 후 연극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엄마, 나 주유소 아르바이트하려고요."
친구 따라 주유소 알바를 해보고 싶다고 목장갑에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한동안 주유소 알바도 했었다. 난 가끔 그곳으로 간식 배달을 가곤 했다.(하노이에서 한국 잠시 귀국 중) 사실 아들이 잘 있는지? 행여 노심초사 걱정이 되었지만 아들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확인 후 돌아왔다.
아들을 키우며 나는 머릿속이 어떤 생각으로 화가 나거나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전에 뚜껑을 여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20세가 넘으면 본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답이 아닐까? 그 후로도 중국어와 영어 과외 알바보다 아들은 24시간 편의점과 피시방을 전전 긍긍하며 알바를 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많이 쇼핑 온다는 서울 명동 00 백화점 명품가방 판매원으로... 00 백화점 ABC 마트에서 운동화를 팔기도 했다. 호프집 알바도 하면서 꽁치를 태워서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고 횟집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했다. 단기간이지만 늘 새로운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며 용돈 독립을 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엄마~~~~ 나 힘들어~~~"
고단하고 힘겨운 20대 아들의 삶을 응원하며 나는 독한 엄마가 되었다. 마음이 쓰이고 돈을 보내서 아들의 힘겨운 삶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마음을 접느라 자주 오던 한국도 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아들은 일식 라멘, 감성주점, 학교 세미나 알바, 일본식 만두를 빚었다며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프로 게임어도 되어 볼까? 미친 듯이 게임도 한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라, 샐러드가 대세라며 샐러드 빠에서 판매도 하고, 아보카도 손질법도 배웠다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주차요원으로 일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영상편집을 해보았는데 재미가 있다며 한동안 영상편집 쪽 일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구글 인턴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었다고 한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아 방황하고 고민하던 20대 아들은 급기야 열 가지도 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알아가고 있었으며 코로나로 힘겨울 동안 영상 편집일을 병행하며 살아남기를 한 것이다. 여전히 높은 벽을 뛰어 넘어가야 함을 알지만 지금은 엄마가 곁에 있으니 힘겨운 삶에 잠시 날개를 접고 쉬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엄마, 엄마, 내가 용돈 줄게~"
이른 새벽,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깬 아들은 5분만 더 자고 싶다더니... 씻는다. 그리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아산에서 서울 강남까지 엉뚱하고 모자란 것 같은 아들을 그저 바라보고 믿어주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트렁크 가방이 집으로 돌아왔다. ㅎㅎ
독립하겠다던 가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당분간...
드디어 나도 아들의 첫 용돈을 받을 수 있으려나?? ㅎㅎ 조금 기대가 된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이 무탈하길 바라고 많은 시행착오를 담담하고 의연하게 이겨내고 받아오는 돈의 가치를 알아가는 시간들이 되길... 아들의 탄력적인 출. 퇴근 시간으로 가능해진 아들의 시간표는 여전히 엉뚱하다.
일에 푹 빠진 아들은 언제나 삶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열정이 있다. 그 많던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고 말렸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20대 힘겨운 삶은 훗날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몸을 녹여 피워내는 촛불처럼 바람결에도 꺼지지 않는 한 줌의 빛으로 밝음 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LED 등이 아니면 어떠하고, 형광등이면 어떠하고, 작은 알전구이면 어떠한가? 각자 자신의 빛을 발할 수 있음 되는 게 아닐까?? 언제나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아들은? 지금 뭐 한다고? 열심히 걷고 뛰며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