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는 막내며느리

그리움 1

by 아이리스 H

#1. 김 씨 가문의 막내며느리


삼 형제 중 막내 였던 남편을 만나 늘 명절이면 큰집에서 모였다. 다행스럽게도 서울 근교에 다 살고 계셔서 오고 가는 불편함은 없이 새벽에 갔다가 오후 한나절 지나면 친정으로 가곤 했다. 그래서 명절 스트레스와 시집살이 없이 결혼생활은 평탄했다. 게다가 두 형님들과 나이차가 많아서 뭘 해도 그냥 귀여운 막내며느리였다. 못하는 게 너무 많았던 나의 신혼생활을 떠올려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립다.


큰 형님이 쪽파 한 단을 다듬어 달라고 신문지를 거실 한편에 깔아주셨다. 끈이 묶여 있던 제법 큰 쪽파 한 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풀지도 않고 하얀 부분 뿌리 쪽 밑동을 3초 만에 칼로 싹둑 잘랐다. "형님 , 쪽파 다듬었어요" 깜짝 놀라 눈이 커진 채로 잠시 멈칫하시더니 " 야야 끈을 풀고 하나씩 다듬어야지.. 그리 싹둑 잘랐냐? 에구머니나..." 더 이상 말을 못 하셨다.


그 후, 나는 주방에서 멀어졌고 설거지만 하는 김 씨 가문의 여인이 되어갔다. 두형 님의 음식 솜씨는 워낙 좋아서 나는 시댁에 가서 한 번도 칼을 잡지 못했다. 다만 조카들의 기쁨조 작은엄마로 살아남았고 설거지와 정리의 달인으로 그나마 자리 잡던 중~ 사과를 깎으라고 과도를 주었다. 두껍게 껍질을 반이상 벗겨내던 나에게 어쩔 줄 몰라하던 형님의 다급한 한마디


"야야 다 벗기고 뭐 먹을 라고?.. 요래 요래 잡고 껍질을 얇게 그리 깎아야지 " 과일 칼을 뺏아 가셨다. 나는 얼굴이 사과색이 되었다. 어설픈 새댁의 좌충우돌 집안일은 큰 형님 눈에서 자주 레이저를 발사시켰다.

막둥이 귀요미 남편의 한마디

"농약 많으니 그리 깎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형수? ~사과만 못 깍지 다른 건 다~잘해요~"

남편은 시댁에 가서 늘 나를 대변해주고 욕먹는 미운 막둥이 서방님 역을 배우처럼 잘도 해냈다.


첫아이 임신 중일 때 나는 몸이 약해서 쉽게 피로를 느끼곤 했다. 시어머니의 배려에 반응하는 막내며느리

"애기야 , 몸도 무거운데 방에 가서 쉬어라" "네 어머니, 그러지 않아도 너무 피곤해요!" 말도 잘~ 듣는다.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일손을 거들었어야 했다. 두형 님의 혀끝 차는 소리가 쯧쯧..

철없는 막둥이 남편은 눈치 없이 따라와 내 옆에 눕는다. "나도 피곤해" 어쩌누?? 이 막둥이들...


삼 형제 생일엔 모여서 축하해 주고 며느리 생일은 안 챙겨 주는 김 씨 집안 나는 며느리 생일도 챙겨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그동안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두형 님들은 막내며느리의 당찬 행동과 말에 후들후들 떨면서도 날 응원이라도 하듯 "말 잘했다 동서"그 후 김 씨 집안의 며느리들도 생일엔 선물도 받고 축하도 받게 되었다.


명절에 많은 음식과 설거지는 모두 여자 몫이었다. 그래서 뽑기 종이를 만들어 남자들도 설거지를 하는 방법으로 바꿔놓았다. 색종이에 '꽝'이란 글씨를 뽑으면 설거지 패스고 '당첨'을 뽑으면 설거지를 하는 거다. 6개 중 세 개는 '당첨'이다. 3명 안에 들면 설거지를 안 하게 되는 거다. 여자는 빨간색 종이를 잡게 미리 짰다. 모두 '꽝'이다. 삼 형제는 모두 설거지에 '당첨'되었다. 축하합니다!!! 호호호 깔깔깔 잔머리 막내며느리에게 통쾌하게 당한 김 씨 형제들 지나고 보니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세상을 바꾸는 지혜가 필요했기에 유교문화에 익숙해진 조상 모시기를 콘도에 가서 하기로 의견을 제시했다. 명절 연휴에 여행을 준비한다니... 누가 보면 콩가루 집안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지만 김 씨 삼 형제는 획기적인 제안을 접수했고 명절 연휴 속초 바닷가로 놀러 가기도 했었다. 문어랑 온갖 해산물을 실컷 먹었던 명절날 식용유 기름에 쩐 전 부치기도 패스하고 갈비찜도 잡채도 없이 행복했노라고..


겁 없고 철없던 막내며느리의 입성으로 김 씨 가문은 몰락의 위기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명절 만들기를 실천하며 변화를 했다. 시댁 며느리가 되면 시금치도 안 먹고, 시청도 돌아갈 정도로 시댁을 싫어한다는데...


나를 키워주신 친정 부모님께 좀 미안하지만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친정보다 새로운 제안에도 거부감 없이 들어주고 어설프고 서툴러도 비난 대신 웃음으로 넘겨주는 시댁에서의 나의 삶은 행복했다.


#2. 그렇게 15년 후.


두 형님의 고생과 수고에 은혜를 갚겠다며 새해맞이를 우리 집에서

" 막내인 제가 준비해 보겠습니다"

시댁 식구들을 초대했다. 32평 아파트를 장만한 기념과 집들이 겸 새해 설날을 맞이 하기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냉장고 정리와 청소로 분주했고 이것저것 14명의 밥 한 끼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에 뭔가 척척 잘할 수 없는 내가 겁도 없이 명절을... 떡은 퍼지고 만두는 터지고 국물은 졸고 텁텁한 떡만둣국은 그날 커다란 들통 속에서 내 마음과 함께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나마 하루 전 오색전 꼬지가 있어 겨우 체면 유지를 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시댁 식구들에게는 폐업 신고 낸 식당이 되었고 여전히 형님댁에서 명절을 치렀다. '큰며느리는 하늘이 내려주는 거'... 난 막내며느리가 딱이다.



#3. 20년 후

당뇨 합병증으로 투석을 하시던 시어머니는 응급상황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84세 삼 형제는 병원 로비에서 만나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할 건지? 그냥 말 건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었고 심폐소생술로 행여 살아나신다 해도 휠체어 신세나 누워서 생활해야 한 다시며 누군가가 집에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겁 없는 막내며느리 "일단 심폐소생술 해보고 살아나시면 제가 모실게요" 말했다. 어머님은 심폐소생술로 기적처럼 살아나셨다. 하지만 장기능의 파열로 소변. 대변을 받아 내야 했다. 나는 일을 병행하며 대학 병원을 오고 가다 과로로 쓰러졌다. 딸이 없는 어머님에게 나는 딸처럼 살가운 막내며느리였다. 그 후 아주버님과 형님들의 반대로 어머님은 공기 맑고 깨끗한 남양주 요양병원에 모셨지만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그곳에 가서 어머님의 말벗도 되어주고 머리도 빗겨주고 거울도 사다가 사진도 찍어주며 좋아하시는 요플레도 떠먹여 주었다. 애기가 되어버린 어머님은 내손을 붙잡고 말씀하셨다.

" 부부는 떨어져 살면 안 된다. 어디든 따라가야 한 다시며 꼭 붙어서 살아야 한다" 외국 출장과 무역업무로 바빴던 남편과 나의 생활이 못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었다. 그 말이 유언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투석을 하시다 응급상황으로

요양병원에서 두 달도 못 사시고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잊지 말라고 내 생일날에 홀연히 길을 떠나셨다.

세상에서 나를 이뻐해 주고 사랑해주셨던 시어머님의 사랑은 나의 마음속에 더 큰 사랑으로 남아있다.


막내아들은 외국 출장이 잦았고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펑펑 울었다. "엄마.. 엄마.." 막내아들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깨어나지 못하시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그 후 , 유언대로 나는 남편과 함께 하노이행을 택했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겁 없는 막내며느리는 여전히 김 씨 가문에 빛으로 살아가고 있다. 난 시댁 식구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지금은 멀리 있어서 자주 볼 수도 없지만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모하고 돌발적이고 좋고 싫음도 너무 티 나게 말했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좋았던 기억만 남기고 아쉬웠던 모든 부분은 삭제 버튼을 눌러주길 부탁해본다.

'미워하며 사는 삶 보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훨씬 쉽다는 걸... '시댁에서 배웠다. 코로나로 명절도 퇴색되어가고 모여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니... 북적북적 시끌시끌 하하호호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