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이 되기 위해 글을 꾸준히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by HK

어려서부터 뭔가 딱히 강력하게 하고 싶었던 일이 없었다.


언젠가 나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친할아버지가 한량이었다는 우스갯소리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는데, 어쩌면 진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지 않고서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나의 성향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한량: 일정한 직사(職事)가 없이 놀고먹던 말단 양반계층.”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나 또한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어야 뭔가 열심히 하는 타입인 관계로 대학교 1학년 때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지 않으면 나는 일을 오래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사람들을 찾아가고 물어보면서 내가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회계사 상담도 받아보고 변호사 상담도 받아보고 금융권도 찾아보고 여러 가지를 찾아봤었다. 그러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온 뒤로 스타트업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에어비앤비와 우버를 보고 그런 서비스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다. 그 뒤로 3곳의 작은 스타트업에서 서비스를 론칭하는 경험을 했었다. 꽤나 재미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말 사회를 바꿀 만한 우버와 에어비앤비를 만드는 회사는 그중 없었기에 정규직을 찾을 때는 다른 회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정규직을 시작했고 지금은 만 4년 차 스타트업 기획자가 되었다.


내가 했던,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사회를 바꿀 만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회사라고 물어보면 밖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최소한 회사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일하긴 한다. 그런다고 실제로 넥스트 우버나 에어비앤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의 커리어에 꽤나 만족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전은 막상 이 일을 하고 보니 또 다른 것을 원하는 내가 보였다는 점이다. 일을 하면서 나는 더 개인적이면서 완성도가 높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게 큰 문제인데, 제품 기획자이면서 고객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삶을 즐기면서 내가 그 삶 속에서 느낀 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서비스들을 사람들이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더 나아가서는 빠르게 테스트해 보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게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 어찌 보면 스타트업의 애자일 방법론과 완전 반대되는 태도인 것이다. 분명 이건 성공적인 서비스를 만드는 방법론은 아닐 것이다. 근데 나는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혼자 글을 쓰는 일을, 혼자 커피를 내리는 일이 좋다. 내 스스로만 소비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나는 내 만족도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기적이지만 나는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들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인드셋이지 않은가? 가히 한량적 마인드셋이라고 할 만하다. 그냥 내가 하는 일을 남이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적인 생각일 것이다. 근데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냥.


남들이 하는 방법론, 누구나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침몰하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어떤 것도 뛰어나지 않아서 남들 하는 방식으로 하면 성공도 만족도 할 수 없다. 내 스스로 만족하며 일말의 경쟁력이라도 가지려면 남들이 안 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운이 좋으면 세상의 인정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남들보다 평균 이상으로 잘할 만한 건 꾸준히 하는 것밖에 없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꾸준히 하는 것. 그러다 보면 운이 좋으면 뭐라도 되겠지.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세상의 방식으로 이것저것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가는 경쟁에서 도태될게 뻔하기에 잃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 재능도 없는 내가 쌓일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면 일단 글쓰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야 나만 만족하면 되는 글을 꾸준히 쓰는 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일 테이니. 한량에게 가장 맞는 일인 듯하다. 그러다 보면 운이 좋으면 누군가는 읽어주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사실 이런 도전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인 한량으로 태어난 이 기질이 너무 안쓰러워서이다. 이 세상은 열심히 사는 열정맨들 위한 세상에서 나도 항상 그런 척하며 살아야 돈 벌어먹고 살 수 있다. 다행히도 스타트업에서 제품을 만드는 일은 나에게 조금이나마 열정을 주는 일이라서 세상에 영혼 없이 일하는 사람들보다는 열정이 더 느껴지는지 다행히 최소한의 인정이라도 받으며 사는 듯하다. 근데 그 열정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 나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량 기질은 늘 항상 죄책감 속에 깊은 곳에 묵혀두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이라도 내 한량 기질이 본인의 존재감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뭔가를 잘하지 못해도 이것저것 보고 느끼고 그것에 대해 인사이트 하나 없는 생각들을 적는 일들. 순간에 감사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한량. 더더욱 그런 한량이 되기 위해 이 글을 꾸준히 쓰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도서 5:20)


작가의 이전글한옥마을 들고양이 실종사건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