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이기주
‘온도’라는 단어에 호감의 수은주가 가파르게 올라간다. 사실 이기주 작가는 잘 모른다. 대신 장하석의 유명한 과학 철학서인 <온도계의 철학>이란 책이 엉뚱하게 떠올랐다. 그 책을 읽지 못했던 오래된 부채감이 한순간에 나를 이 책으로 불러들인다. 책 제목은 무슨 이유에서든 중요하다.
작은 책에 작은 활자가 나 같은 노안에 불친절하다고 생각하려던 차, 에세이 한 편마다 여백이 많아 잔뜩 찌푸려진 눈을 곧 펴게 해 준다.
내 안에서는 과학 실험이 발 빠르게 시작된다. 이기주 작가의 온도는 과연 몇 도쯤일까?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 정렬해 놓은 활자를 조심스럽게 측정해 간다. 한 글자 한 글자의 온도를 재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놀라운 반응이 책과 독자인 나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책은 아주 착했다. 교과서처럼 좋은 말들로 채워졌고, 작가의 세심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으니까.
괜찮은 글이 가득 담긴 상당히 수준 있는 책이라는 것과 작가도 꽤 괜찮은 인간일 거라는 신념에는 첫 장부터 끝장까지 수은주의 높이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읽는 재미의 온도가 차츰차츰 떨어진다. 식어 가는 온도계를 보며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의아해하면서.
이 책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 이기주 작가의 착하디 착한 글에 내 마음은 왜, 싸늘하게 식어간 것일까? 이건 무엇을 향한, 어떤 반감이란 말인가? 이렇게 조용하고 결이 차분한 이기주 작가의 글에 어떻게, 감히, 반감 내지는 비호감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작가를 미워할 근거가 내게 있나? 없다. 읽으면서 사뭇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음으로 긍정한 글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다 싫증이라도 났다는 것인가? 듣기 좋은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불과 300페이지 만에 내 귀에 딱지가 앉아 버렸단 말인가?
그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줄 몰랐던 거북함과 맞이해야 했다. 나를 난감하게 만든 책.
여기서 잠깐,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저처럼 비슷한 온도를 느끼신 분이 혹시 계신지 묻고 싶다. 정말이지 한반도를 다 뒤져서라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고 싶다. (카톡에서라도 만나요. 우리! 뭔가 대단히 클릭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인터넷에서 작가의 사진을 보니 용모가 준수하고 말끔하다. 역시나 책에서 받은 인상 그대로이다. 동영상에서 강의하는 이기주 작가의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뭔가 글에서 체감한 이기주 작가의 온도와는 다른 그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작가를 글로 만나, 받게 되는 서로 간의 온도가 왜 이리 따뜻하지 못하고 차가운지 나는 그 이유를 꼭 찾고 싶다. 이 책이 내게 던진 새로운 미션이라면 미션이다.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작가 소개에서 자신을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놓는” 사람이라 했다. 나는 가슴이 뜨끔해지고 오그라들었다. 분명,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감탄할 정도로 섬세한 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영어로 치면, 치지(cheesy)하다는 느낌만 강하게 달라붙을 뿐.
아마도 이 글이 에세이여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같은 글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 속 캐릭터의 목소리였다면 그런 센티멘탈한 주인공에게 하트를 사정없이 날렸을지도 모른다. 근데 글쎄… 에세이의 맹점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의 입에서 실제로 나온 말이라고 하면,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의 온도에 순간 굴절이 생긴다. 온도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를 멈춘다.
나도 에세이를 쓰고 있어서, 그래서 더 불편하게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내 입으로 내가 하는 말입니다”라고 실명으로 쓴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가질 작가에 대한 거친 상상과 호불호에 대한 평가가 두려웠는지 모른다. 나처럼 차갑게 식어갈 독자의 눈동자 여럿이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하나둘 방을 떠나듯 글로부터 떠나가는 하트들을 마치 눈앞에서 서글프게 목격하고 있는 것같이.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그의 글은 너무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의 하얀 식탁보를 대하는 것 같다. 너무 깨끗해서 밥알이 붙은 더러운 밥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마저 조심스럽고 불편하다. 아니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과 같이 앉아서 힘들게 밥을 먹는 느낌이던가. 그래서 밥알이 뱃속에서 하나씩 서서 벌 받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라는 부제를 단 <언어의 온도>를 쓴 작가이기에 얼마나 단어 하나하나와 글의 메시지 하나에도 신경을 썼을까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교과서처럼 반듯해서 들으면 모두 감탄하고 유익한 말들이지만, 바로 그 바른생활의 맛이 내 입맛에는 식상했다. 마치 사람도 너무 정갈하고 깨끗하면 사귀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처럼.
나를 불편하게 만든 책인 것은 확실하다. 책에 집중하기보단 모난 나를 자꾸 보여주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반응을 하게 하는 책. 평소의 나보다 더 모나고 싶어 진다. 반항심의 온도는 자꾸 올라간다.
그래서 겁이 났고 싫었던 것 같다. 왠지 이 책을 계속 읽고 있노라면 꼬여 있는 나의 끝은 과연 어디까진지 서늘하게 맞닥뜨려야 할 것 같아서.
글에 대한 열등감도 없지 않다. 작가의 글이 나무랄 데 없이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여서. 그의 글 온도가 너무 적절하고 따뜻했기에. 그렇다. 열등감.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다. 나도 작가처럼 센티한 면도 없지 않아. 작가가 느끼는 삶의 철학 정도는 나도 충분히 가지고 있어.라고 끝없는 변명을 나 자신에게 늘어놓고는 열등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금 이런 글을 서평이라고 쓰고 있는 내 언어의 쌀쌀맞은 온도에 경기가 날 지경이다. 나는 이렇게 재수 없고 한심한 인간이었구나. 내 언어의 온도를 필요 이상으로 정확히 측정해준 이 책이 그래서 얄밉다. 그러나 사실인 걸 어떡하랴? 책머리에 경고장이라도 하나 적어 두면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후 당신의 언어 온도에 된서리를 맞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죄송합니다. 이기주 작가님. 언총(言塚)에 묻어야 할 말을 여기에 발설하고 갑니다. 작가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속 좁은 독자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