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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ul 02. 2017

낯선 이의 친절만이라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을 읽고 2% 정도 부족함을 느껴 영화를 찾았다. 희곡 대사와 감정의 묘사만으로 띄엄띄엄 읽혀, 퍼즐 같았던 스토리가 조각조각 영화 장면들로 살이 입혀진다. 원래 희곡으로 쓰인 작품인지라 무대 위에 올려져서야 비로소 작품의 완성도를 이루는가 보다.


작품의 배경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뉴올리언스이다. 이야기는 남부 백인으로 집안 대대로 부유하게 살았던 블랑시라는 여인이 동생 스텔라와 그녀의 남편 스탠리가 사는 도시 뉴올리언스로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처형 블랑시와 제부 스탠리의 갈등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시종일관 첨예하게 각을 세운다. 주로 이 둘의 갈등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라 독자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잠시 로맨틱한 블랑시와 노총각 미치의 사랑이 전개되지만, 그녀의 과거를 폭로한 스탠리 때문에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이 극의 주인공이라 할 인물은 단연 블랑시 (영화에서는 비비안 리가 열연했다)다. 그녀의 언어로 표현된 감정의 변화와 생각을 좇아가는 것이 퍽 흥미롭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기도 한 그녀이지만 그런대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제부 스탠리에겐 한심하게 보일지언정.

 

그녀가 동생 스텔라와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나누게 되는 자매간 사랑의 대화, 제부 스탠리와 사사건건 겨루게 되는 말싸움과 기싸움, 연인 미치에게 속삭이는 그녀만의 감미로운 노래를 통해 독자는 어느덧 블랑시의 세계로 인도된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다소 예민하고 현실에 적응이 힘들어 보이는 블랑시에겐 뼈 아픈 과거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린 나이에 사랑해 결혼했던 열여섯의 어린 남편의 자살이 그렇다. 동성애자였던 남편에 대한 아픈 추억은 <바수비아나> 폴카 음악과 함께 그녀의 기억 속에 언제든 출구를 기다리며 자리 잡고 있다. 때때로 되살아나 그녀의 상심한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폴카 음악은 항상 권총 소리와 함께 사라지지만, 그녀의 아픈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외에도 그녀가 받았어야 했던 삶의 질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 이후 죽음의 신이 집 앞에 텐트를 치듯 부모님과 일가친척의 죽음이 잇달아 그녀 앞에 불어 닥친다. 연이은 죽음은 블랑시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택과 아름다운 꿈의 농장 ‘벨리브’마저 잃게 한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존재였는데 말이다.


절망적인 과거를 잊고자 찾아온 동생과 제부가 사는 뉴올리언스는 블랑시에게 참담하기만 하다. ‘극락’이라는 도시 이름과 너무도 상반된다. 가난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동생 스텔라와 제부 스탠리의 거친 삶 또한 블랑시에게는 매우 낯설기만 하다.


좁고 낙후한 환경만이 아니다. 임신한 동생에게 폭언과 구타를 일삼고, 남자들은 좁은 집에 모여 포커로 밤을 지새우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제부는 살가운 동생의 남편이라고 하기엔 먼 남만도 못하다.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 과거의 영예를 모두 잊어버리고, 블랑시 눈에는 정신병자 같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편의 아기까지 갖고 함께 사는 동생 스텔라를 이해하기 힘들다. 블랑시는 동생 스텔라에게 “그 사람한테 신사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어떻게 자랐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라고 묻는다. 짐승처럼 행동하고, 짐승 같은 습성을 가진 제부를 놓고, 그와 함께 뒤처져선 안 된다고 외치면서. 블랑시가 집착하는 과거의 추억과 스텔라의 살벌한 현실이 부딪힌다.


스텔라와 스탠리

 

스텔라는 오랜만에 찾아온 언니 블랑시와 남편 스탠리 사이에서 매우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방식이 블랑시의 출현으로 인해 되돌리기엔 이미 그녀가 살아온 삶의 울타리가 단단하다. 구타를 당하고도 그녀를 찾는 남편의 절규에 스텔라는 또다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블랑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동생 스텔라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삶이었다고 할까. 그런 그녀에게도 잠시 잠깐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긴 한다. 언니를 결국 정신 병원으로 보내게 되는 상황 앞에서 앞으로 그녀가 남편 스탠리랑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자문하는 장면에서다. 그때 윗집 여인은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그녀를 제자리로 다시 옮겨 놓는다.


블랑시는 그나마 미치라는 순진한 청년에게 마음을 달래가며,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가려고 애쓴다. 미치도 슬픈 과거사가 있는 블랑시에게 연민을 느끼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를 다짐하는데, 제부 스탠리가 이 둘의 사랑을 매정하게 끊어 놓는다. 블랑시의 과거를 미치에게 상세히 폭로한 것이다. 블랑시는 어린 시절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고자 낯선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까지도 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행동을 해서 교사직에서 쫓겨나 동생이 있는 뉴올리언스로 온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블랑시와 미치와의 결혼은 무산된다. 마음 둘 곳을 잃은 상심한 블랑시에게 제부 스탠리는 육체적 겁탈까지 자행한다. 그녀의 삶은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정신없이 달리던 욕망의 전차가 갑자기 정지해버리듯이.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도


그 뒤 블랑시의 상태는 얘기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극에는 불행한 인생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랑을 잃은 이야기. 남편의 동성애를 발견한 충격. 남편의 자살. 부모의 죽음. 저택과 부의 상실. 가난. 가정 폭력. 파혼. 강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싣고 온 것이란 온갖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일뿐이다. ‘극락’이라 불리는 동생이 사는 마을에 이르기 위해선 블랑시가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야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을 차갑게 죽여야만 극락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일까?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지만, 극락과는 거리가 먼 20세기 중반 미국의 가난한 도시 속에는 암울한 인생들만 가득하다.


블랑시가 뭔가 대단한 욕망을 갖고 도시에 온 것은 아니다. 욕망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 볼 여유도 그녀의 마음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 같다. 블랑시가 고작 가졌던 욕망이었다면, 그녀의 과거를 마법처럼 변하게 해 줄 그 무언 가가 아니었나 싶다. 바윗덩어리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 미치라는 인물이 그녀에게 마법처럼 나타나 준 것이라 믿었지만, 그녀의 마법은 오래가지 않고 현실의 폭력 아래 깨져 버린다. 달리던 전차가 한순간에 묘지 앞에 멈춰서 버린 것처럼. 극락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전차는 욕망이 아니면 죽음으로만 달려갈 뿐. 극락은 욕망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찾아내야 하는 신기루 같은 곳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블랑시는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마법을 원해요. 나는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어쩌면 그녀의 마법은 정신병원 의사의 팔에 부축을 받아 걸어나가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블랑시와 의사


마법이나 신기루나 극락은 그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신비롭게 만나게 되는지. 그래도 마음 한 편이 편치 않다. 낯익은 동생도 가족도 연인도 블랑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했다는 게.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도 블랑시와 비슷한 여정을 걸었다고 한다. 스탠리같이 강압적이고 포악한 아버지, 남편에 불만이 많았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어머니, 정신병으로 고통받은 누나, 동성애와 술과 수면제의 과다 복용 등등.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특별히 더 힘든 생을 살다 가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이들의 마음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인간애란 이 지구 상에서 왜 그렇게 찾기 힘든 것인지. 내가 오늘 그래도 별 탈 없이 편안하다면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주변에 내 맘을 편하게 해 주는 인간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니까.



누군가가 앓고 있는 정신과 마음의 병은 모두 벌레 같은 우리 인간들 탓이다. 타인에게 독성을 퍼뜨리는 나쁜 바이러스를 가진 우리들 때문이다. ‘하얀 숲’이란 뜻을 가진 블랑시 드부아처럼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더럽혀지기 쉬운 심성을 가진 자들이 병들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을 조심해서 살살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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