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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ul 11. 2017

촛불을 꺼요, 로라... 잠깐만!

<유리 동물원> 테네시 윌리엄스

요즘 테네시 윌리엄스의 매력에 폭 빠졌다. <욕망… 전차>와 <양철… 고양이>에서 <유리 동물원>으로 이어지는 작품 속에서 찾은 작가의 매력이라면, 인간애의 호소가 그 어떤 도덕책이나 종교서보다도 효과적이다. 드러내서 강요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에 휴매니티를 자극한다. 특히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섬세하고 나약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한 번쯤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는 깨지기 쉬운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과거에 의존해 살아가는 블랑시가 그렇고, 과거의 상처로 인해 현재를 포기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브릭, 내일을 꿈꾸기조차 힘든 로라의 선천적 태생이 그렇다. 우리 주변의 힘없고 약한 누군가를 상상하게 한다. 


이 세 주인공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주변에 어떤 인물을 만나는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는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어떤 이는 한 가닥 희망을 찾아 준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힘에 부쳐 포기하고 도피를 꿈꾸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유리 동물원의 경우 누이 로라와 동생 톰의 관계가 마지막 후자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이 더 애잔했던 건 테네시 윌리엄스의 자전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명인 토마스(톰)를 그대로 사용한 것에서부터, 시를 쓰는 청년이 신발 창고에서 아버지의 강압 때문에 일할 수밖에 없었던 녹록하지 않은 젊은 시절의 이야기. 호탕한 남성적 기질의 아버지가 존재했지만, 엄마와 누이와 가까이 지내며 여성스러움에 젖었던 어린 시절. 감수성이 풍부하나 어려서부터 심약하고 병약한 누이. 히스테리 기질이 있는 엄마의 잔소리가 부담스러웠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청년 시절과 많은 부분 오버랩된다. 특히 누이 로라는 테네시의 누나 로즈와 비슷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남매간 돈독했던 사랑과 연민이 희곡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책은 인간 군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 같다. 로라를 스펙트럼의 맨 왼쪽에 놓는다. 가장 깨지기 쉽고 자존감이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는 연약하고 불쌍한 인격체이다. 자신보다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그들로 인해 받는 영향이 필요 이상으로 많고 부정적이다. 


그녀 다음으로는 동생 톰을 놓으면 적절하다. 로라보다 조금은 더 강인하고 덜 예민하나, 여전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기 쉬운 타입의 인간형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치에 있다. 


반대로 로라와 정반대의 우측 스펙트럼 끝에는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찾아 혼자 먼 여행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세울 수 있겠다.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보다는 자신의 삶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 최소한의 가족을 부양할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던져 버릴 수 있다. 


아버지까지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 가족을 어떻게 해서든 성공적으로 살게 해 보려고 애를 쓰는 강인한 어머니 어맨다의 위치는 연약한 인간으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로라의 스펙트럼 쪽보다는 아버지 쪽에 가깝다. 삶에 긍정적이긴 하나, 자기 방식에 머물러 있어 타인을 대하는 유연성이 부족하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단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빨라 언제나 충돌이 있다.


로라와 톰이 스펙트럼 한쪽에 자리 잡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른 한쪽에 있다. 그 중간에 가장 현실적이자 이상적인 신사 방문객 짐이 있다. 짐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이라고 해도 좋겠다. 현실에 잘 적응하고, 단점이 없지 않지만, 자신의 장점을 살려 부족함을 채워가고, 가정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변의 나약한 인물들에게 희망과 삶의 기쁨을 심어 주고자 노력한다. 훌륭한 인간미까지 갖춘 모범적 인물이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로 충만하다면 로라와 톰같이 삶의 무게를 힘들게 지는 사람들이 현격히 줄어들 것 같다. 촛불 같은 삶이 꺼지지 않고 잘 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법인지, 각기 다른 인간 군상에도 그 비율이 적절하게 존재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톰이 엄마에게 서로 존중하자고 외쳤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을 차지하는 인간 군상들은 그나마 마음을 놓아도 괜찮다. 비교적 자존감이 높고 일단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정력적으로 돌진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돌봄이 그 반대 선상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필요하다. 그들은 자아가 강해 알아서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많다. 타인에게 무심할 수도 있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도 이들은 혼자 놔두어도 저 잘난 맛에 잘 살아간다. 현실이 힘들다면 예전에 좋았던 추억이라도 꺼내 씹으며 살아갈 정도로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다.


하지만, 로라와 같이 왼쪽 스펙트럼에 있는 내성적인 사람들은 세심한 케어가 필요하다.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던 유리로 된 동물 장식품들 같다. 매일같이 닦고 깨지지 않도록 주위를 들여 관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해서 깨져 버리면 원 상태로의 회복은 없다. 그것으로 생명은 끝이다.  


로라 같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짐과 같이 온전한 신사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힘이 넘쳐나는 사람만이 로라같이 연약한 사람의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생 톰은 로라를 돕기에 역부족이었다.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으니까. 톰에게는 그를 그답게 인정해 줄 긍정의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주변 인물인 엄마는 톰을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럽게 했다. 서로를 힘들게 할 뿐이다. 결국, 톰은 가출해 달나라보다도 더 먼 곳으로 탈주해 버린다. 원치 않았지만, 가족을 버린 아버지와 같이 집을 떠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선 언제나 자신보다 더 열악한 위치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누나 로라가 눈에 밟힌다. 집을 떠나왔지만, 아버지처럼 맘 편한 한량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톰에겐 로라를 살릴 뾰족한 방법이 없다. 나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해 보지만, 로라의 촛불을 지켜줄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의 촛불을 차라리 끄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해 줄 수 있는 것뿐. 요즘은 세상이 전깃불로 밝힌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 로라와 안녕을 고한다. 희곡의 마지막 독백 장면이다. 이 장면이 눈물 나게 슬픈데, 여기서 로라는 스스로 자신의 촛불을 끈다.




동생 톰은 로라에게 왜 촛불을 끄라고 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힘드니 포기하는 게 좋다는 의미였을까? 자각과 회의로 가득 찬 한탄이었을까? 이 풍진 세상을 촛불 하나로 힘겹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이 세상과의 작별이 평안하다는 현실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애처롭다 못해 딱하고 딱하다 못해 분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톰은 할 수 없었다고 치자. 로라 같은 인간을 바라보는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없을까? 짐과 같은 이상적인 인간이 못 되기에, 그것이 가당치도 않을까? 우리 주변엔 사실 이상적인 사람보다는 극 중 아버지와 어머니 또 톰과 같은 사람이 더 많다. 게다가 진정한 신사 방문객이 내 집에 제 발로 찾아오기란 상당한 운이 필요하다. 톰이 말했듯이 “우리가 살면서 언제나 기대하게 되는 것”이지만 로라에게 짐과 같은 인물이 또다시 나타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무슨 마술 같은 해법이 쉽게 존재할 거라고 섣불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도 이 희곡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촛불을 꺼요. 로라”라고.


그래도 잠깐! 촛불을 끄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하나라도 없는지 생각해 보자. 촛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만이라도 인정하는 건 어떨까? 신사 방문객처럼 로라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줄 힘이 우리 안에 없더라도, 로라의 그 독특함과 여린 감성만이라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로라를 “푸른 장미”라고 불러 줄 수 있는 용기와 배려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세상은 붉은 장미와 푸른 장미가 어우러져 사는 찬란한 빛의 세상으로 물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먼저 돌아보자. 우리 가족 중에 ‘푸른 장미’로 고독해하는 이는 없는지 세심하게 마음을 들여 관찰하자. 여리고 깨지기 쉬운 그의 뿔이 이상하고 흉하다고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잘 닦고 지켜 줘야 할 유리 동물은 아닌지 살펴보자. 


어쩌면 생각지도 못하게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유니콘처럼 뿔 달린 독특한 유리 동물 하나를 찾아내려다 유리 동물원 울타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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